
독일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기고문을 읽었다. 이차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국민들의 몸에 밴 검소함에 대한 글이다.
그들의 검소함은 익히 들어 알지만, 이 기고문은 나에게 커다란 감명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독일 주부들은 해어진 양말을 기워 신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나에게도.
객지생활을 해 본 남자들이면 다 겪는 일이지만, 양말을 깨끗이 세탁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겉옷 같으면 세탁소에 맡길 수가 있다. 매일 갈아 신어야하는 양말은 본인이 직접 빨아 말려서 신어야 한다. 그게 잘 안되니까, 궁리 끝에 한꺼번에 양말을 여러 켤레 사서 돌려가며 신는다.
글을 쓴 사람 역시 그렇게 했다. 귀국 날짜가 임박한 시점에 한 번씩 신고 모아 둔 양말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그런데 그 하숙집 안 주인은 버리고 온 양말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자신에게 항공우편으로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감명을 받았으면, 한편으로는 얼마나 부끄럽게 느꼈으면, 지상에 기고를 했을까 싶다. 전후 폐허를 딛고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독일이다.
2차대전이 끝난 지가 육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까지도 그 때를 잊지 않고, 가정에서부터 검소한 생활을 이어오고 있음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새 출발을 한 우리는 어떤가.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은 우리들은 그 쓰라린 아픔의 역사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내 주변의 예를 보더라도 그렇게 느껴진다.
아파트에서 이사하는 사람마다 잔뜩 세간을 내어놓고 간다. 그들이 떠난 후에 보면 멀쩡한 장롱이며, 책상이며, 책이며, 가스렌지 같은 꽤 값나가는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지, 그 기고문의 메시지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불과 십여 년 전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 때에도 우리 사회는 과소비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다. 너도 나도 외유성 해외관광이 유행병처럼 퍼졌다. 해외관광을 하기 위해 마을마다 계모임이 성행되기도 했다. 이 같은 과소비는 결국 외환부족사태를 불러왔던 것이다.
IMF 구제금융 지원이 결정 되던 날, 우리는 제 이의 국치를 당했다고 허탈해 했다. 처음엔 정부에 대하여 울분을 터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흥청망청 과소비를 부추긴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마침내 국민운동이 일어났다.
돌 반지부터 결혼반지까지 아낌없이 금붙이를 내놓았다. 이것을 모아 수출하여 벌어들인 외화가 이십 일 억 불이나 되었다.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한 지 불과 십여 년이 흘렀을 뿐이다.
우리가 과소비를 경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관계로 이 부분 외화 유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외유성 관광도 마찬가지다. 경상수지 적자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도 그 기고문의 내용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내가 헌옷을 박스에 가득 담아 놓았다.
여러 해를 입어 약간 낡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입을 만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정말 아까운 것은 애들 옷이다.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커가니 이년 전에 입었던 옷이 맞을 리 없다.
그렇다고 물려받을 애들도 없으니, 내놓을 수밖에 없기는 하다. 문득 그 독일여자의 절제된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몰래 뒤적거려 보았다.
아직도 쓸만한 옷을 내오지나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내에게는 좀 미안한 행동이지만, 그 기고문을 읽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말에 나라가 위태로우면 어진 신하를 생각하게 되고, 가정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그 독일 여자 같이 나라와 가정을 걱정할 줄 아는 국민으로 살아가야겠다.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