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장 거행…거제시체육관·생가에 분향소 마련
최연소·최다선 의원, 금융실명제·하나회 해체 등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0시22분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원인은 고령인데다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이 겹쳤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 전 대통령은 고열 등 지병으로 지난 19일 낮 12시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으며 21일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2009년부터 반복적인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치료를 받아왔으며 지난 2013년 4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과 급성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입원 당시 고열이 동반된 호흡곤란을 겪는 등 이미 상태가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과거 심장병 관련 스텐트 시술을 받은 이후에도 여러 혈관질환이 있었고, 뇌졸중이 동반되면서 최종 사망한 것으로 병원은 보고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거제시도 거제시체육관과 YS생가 인근에 분향소를 마련해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한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國家葬)으로 거행된다. 장례기간은 5일이며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국가장 기간 중에는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3김(金)시대를 호령하던 인물 중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제외한 두 명의 거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 전 대통령은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총선에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출마해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다. 이후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하고 이후 1960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야당 인사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정 이양 번복 발표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다. 3선 개헌에 반대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1969년 상도동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했다.
1971년 제7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바람을 일으켰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1979년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가 경찰에 끌려나가는 'YH 사건'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1980년 사실상 강제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두차례 장기간 연금되면서 전두환 정권 시절 시련기를 겪었다.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1990년에는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이 됐고,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사실상의 첫 민간 대통령이었던 그는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첫해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했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자신과 가족 재산을 공개해 여론이 지지를 받았다. 북한에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권 초반 지지율이 90%에 육박했다.
취임 3년차인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특별지시로 지방자치제도를 확대해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했다.
1996년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가입했다. 하지만 1997년 1월 한보철강으로 시작된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고 그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