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4년 동안 나는 외국사람에게서 우리 형편에 대한 여러 가지 불쾌한 질문을 받았다.
그 중에도 제일 나의 맘을 괴롭게 한 것은 ‘귀국에도 고유한 문자가 있느냐? 그것은 한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완전히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네들 중에는 ‘귀국의 언어는 일어와 완전히 다르냐? 현재 귀국 사람간에 통용되는 것이 일어가 아니냐’고 묻는 이까지 있다.
세계 어느 종류의 그것보다도 완미한 문자가 우리에게 있는 것을 그네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물론 그네들에게 일부분의 과실이 있다. 그러나 우리글 우리말에 대한 우리민족 자신의 너무도 냉담한 태도를 볼 때 나는 ‘적어도 이 책임의 일부분이 우리 민족 자신에 있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과거 우리민족은 자기의 문자 자기의 언어를 너무도 멸시하였다. 고대의 여러기록-대동운부군왕, 문헌비고, 용비어천가주(註)-는 한문 수입 전 우리에게 고유한 문자가 있던 것을 설명한다.
신지(神誌)의 비사(秘詞)-구변도국, 운관버기-는 문자가 있고야 기록되었을 것이요 그때 우리에게 한문이 수입되지 아니하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 고유한 문자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대강 추측으로라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의 형체는 고사하고 그의 유무조차 정확하게 설명할 만한 재료를 얻을 수 없다.
설총의 이두문은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완전한 우리글이라 할 수 없으니 그만 두려니와 세종의 훈민정음은 우리에게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가? 중국의 한문은 진서-참글-라 하면서 우리의 정음(正音)은 언문-상말글-이라 하였다.
사서삼경이나 고문진보같은 진서(眞書)에 달리어서 진서의 의사를 보충하는 것과 ‘각설이때 조웅이 필마단창으로…’라는 허황환 이야기책이 되어서 행낭하인이나 시골나무꾼의 심심소일꺼리가 되는 것이 언문-상말글-의 유일한 임무였다.
신지의 고문자가 한문의 수입으로 그의 존재조차 잃게 되고 만 것같이 세종의 정음은 한문의 전제(專制) 밑에서 남북전쟁 전 미주(美洲)의 흑노(黑奴)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당하였다.
이뿐 아니다. 자기의 글을 상말글이라 하여 천대한 그네들은 자기의 말조차 상말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날씨가 따뜻한다’는 것은 상(常)말이요 ‘일기(日氣)가 온난(溫暖)하다’는 것은 점잖은 말이다.
‘헤여진 옷’이라는 것은 상말이요 ‘남누한 의복(衣服)이라는 것은 점잖은 말이다.
‘새바람’이며 ‘마파람’이며 하는 것은 상(常)말이요 ‘동풍(東風)’이며 ‘남풍(南風)’이며 하는 것은 점잖은 말이다.
양반, 상놈이라는 엄한 계급을 만들어 평민의 생존권을 무시한 그네들은 점잖은 말, 상말이라는 명사(名詞)를 지어 자기네의 말을 학대하였다.
만일 그네들의 소위 상놈이라는 무식계급이 없었다면 우리 고유의 언어는 모두 유실되고 말았을 것이니 우리가 현재 외국사람에게서 상술한 바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된 것이 일방면으로 보아 어찌 ‘우리의 책임 아니라’할 수 있으랴?
양명 선생 약력
- 거제공립보통학교 (1916년 졸업)
- 부산공립상업학교 (1919년)
- 북경대학 문과 (1923년)
- 러시아 동방근로자 공산대학 (19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