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어머니가 물었다. "선거는 하고 가니?" 자식들 먹여 살리기 바쁜 어머니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그 시절 동네에서 몇 안 되는 대학생이었던 나. 선거를 안 해도 되는 타당한 이유를 대려고 머리를 굴렸다.
"어무이, 자고로 정치라는 게…그리고 정부가 3에스를 이용해…."
격동의 80년대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나는 정치하면 폭력과 억압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내 눈앞에서 친구들과 선배들이 체포되고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캠퍼스를 코를 막고 뛰어다녔으며 보도블록을 깨는 급우들을 보며 학교를 다녔던 나였다.
오직 자신들에게만 말이 되는 이데올로기나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들의 삶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것이 마치 국민을 위한 투쟁인양 가장 하는 정치인들의 닫힌 논리가 싫어서 정치와 관련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니 내가 선거일이라고 선거하러 가겠는가. 내 눈에는 이 사람이 저 사람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아이고, 내가 헛돈을 썼네.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면 선거는 해야지. 뭔 쓰잘떼기 없는 소리고? 문디, 배운 것들이 요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께나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아니가? 잔 말 말고 선거하고 가라. 선거 안하믄 밥도 묵지 말고 학교도 댕기지 마라. 너그는 우리처럼 살지 말라꼬 공부시켰는데 데모는 맨날 잘도 함시롱 우째 선거는 안 한단 말이고. 선거하기 전에는 집에도 못 들어올 줄 알아라. 나라가 잘 돼야 우리가 잘 살꺼 아이가?"
그날 나는 욕 한 바가지와 등짝 한 대를 맞고 거의 쫓기다시피 해서 선거를 하러갔다. 먹고 살기 힘들어 무슨 정치에 관심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고단한 당신의 삶을 발전시키는 한 방법이 선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선거하고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어머니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그렇고 그렇다 해서 선거를 회피한다면 우리 정치는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이 정치판을 기웃거릴 것이다. 매의 눈으로 사람을 살피고 뽑아야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선거기간이면 각 후보자들의 공약 사항을 꼼꼼히 살피고 읽는 편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선거는 하러간다. 거제도 토박이로 태어나 평생 힘든 일만 하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남겨준 교훈이다.
30여 년이 지나 다시 선거일이 눈앞에 다가 왔다. 대한민국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우리의 현실 정치판에서 일어나기는 하나, 투표를 안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나의 한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것이 요즘 나의 지론이다.
호주에서는 투표에 불참하면 벌금을 물어야한다. 벌금액수는 호주 달로로 118달러이다. 벌금을 물지 않으려면 투표에 가지 않은 이유를 자세하게 소명해야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더 귀찮고 힘들어서 호주의 투표율은 90%가 넘는다.
벌금제는 국민의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국민적합의의 표현인 것이다. 민주주의와 기독교 가치를 기반으로 삼는 나라에서도 이렇게 하는데 어느 모로 보나 더 힘든 우리나라가 국민의 힘을 모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이번 선거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선거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