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기회가 세 번이 아니라 그 많던 기회가 사라져가는 아쉬움은 노인이 돼서 더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회 일실의 비탄과 통탄마저도 노령에 내재한 시간은 정말 보배롭기까지 하다.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은 항상 그 얼굴이다. 변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사람이 변화의 실체가 된다. 그것은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우리들의 모습을 만들어온 것이다. 이 가운데는 만족스러운 자기얼굴도 있을 것이고 회한과 불만의 마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실의와 좌절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불안을 부둥켜 안은 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요 자기 탓에서 온다면 변화와 선망 역시 내가 먼저 서둘러야 하고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에게나 세월과 시간은 엄연한 현실이고 특히 노인이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를 내세우며 노인으로서 위치를 선용하고 이에 대처한 능동적 행동과 긍정적 방식은 노인의 가치를 높이는 첩경이 될 것이다.
흔히 노약자라는 말이 상용되듯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노인으로서 자연적인 노쇠현상을 고뇌하기보다는 공생하는 통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아프면 그때마다 의원에 달려가기보다 자연면역을 탐구해보는 생활습관도 중요하다.
노인으로서 할 일은 너무나 많다. 기력이 약해지는 것만큼 인내심과 친화력을 유지하는데 젊은이와 상대적으로 힘이 더 든다. 이제는 노인이 더이상 부양받는 노인이 아니라 사회를 책임지는 노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4.13총선을 치른 사회는 더 어수선하기만 하다. 안보 위기가 고조되는 마당에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은 조직개편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제안정의 기초가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백년대계의 교육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서 일관된 기반이 없다.
노인으로서 우려(憂慮)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노인이 어찌 편하겠는가? 우리 국민의 복지 내지 행복지수는 OECD국가 중 가장 꼴등에 가깝다고 정부기관 조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노인들의 걱정은 세상을 오래 살아온 연륜으로 국가근간을 위한 비분강개한 생각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정의 부모를 닮아가듯 사회교육은 백세시대의 노인들의 복지가 고스란히 젊은 세대들에게 이식된다. 포퓰리즘적인 노령행복이 아니라 노인 스스로 모범이 돼 사회의 발전의 견인력을 끝까지 이뤄야 하는 사명이 남아있다.
노인이 돼 일반적으로 잠이 줄어든 만큼 일하는 시간을 얻는 기회로 알아야 한다. 잠을 잘 자지 못하면 모든 신체부위 활력이 청장년보다 못하다는 생각에만 집착되면 한꺼번에 건강도 잃는다. 불면을 탓하고 노쇠를 한탄하며 빈약을 항상 빌미로 여긴다면 노인의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정치가 국가진흥의 기회를 잃는 것도 사심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라와 젊은이가 불행해지는데 이러한 사회를 감내하기는 세상을 오래 살아온 노인이기에 더하다. 그것은 수많은 기회가 우리들 앞에 놓여있다는 삶에 대한 진실 때문이다.
힘에 겨우면 일을 미분(微分)해 쓰는 지혜를 노인들은 알고 있다. 정치도 그러기를 바란다. 나누고 배려하고 다시 큰 힘을 되찾아 뭉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