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이 들 권리
멍이 들 권리
  • 거제신문
  • 승인 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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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칼럼위원

▲ 김계수 거제시외식업지부 사무국장
아이들이 놀기 참 좋은 계절이다. 한 아파트 놀이터에 젊은 어머니가 신나게 노는 아이 곁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아이와 어머니의 사이가 5월 햇살과 바람의 속살처럼 참 부드럽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상한 요구를 한다. 놀이기구를 타는 순서며 자세, 팔과 다리의 위치까지 일일이 알려준다. 그렇게 타면 다친다, 왼발이 먼저 나와야지, 이제 그거 그만하고 이것 타 봐. 어머니의 너무도 친절한 집착에도 아이는 그저 즐겁기만 하다. 그 즐거움이 불편하다. 멀리서 부드러워 보였던 관계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들은 멍이 들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사랑이라는 가면으로 뺏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체득하는 삶의 기술이 억지로 가르친 것보다 훨씬 오래가고 가치 있다. 손과 발이 뒤엉켜 넘어져도 보고 멍이 들어서 스스로 배운 것만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보호해 준다.

억지로 학습된 것은 머리에 차 있을지는 몰라도 순간적인 몸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귀해진 요즘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제대로 가르치려고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귀한 몸이니 조금이라도 다치면 큰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호들갑이다. 스스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보호 속에서 키워지고 있다. 멍이 들 권리마저 빼앗긴 아이들의 놀이가 재미있을 리 없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웃고는 있지만 계속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수많은 요소 중의 하나일 뿐, 완전히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강할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질겨야 한다. 자녀와 부모는 함께 오래 가야 하는 관계이지 소유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강하면 서로 상처받기 마련이다.

너무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멍 들어가며 혼자 되새김질 하듯이 온전히 체득하는 경험이 험난한 세상을 잘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 다니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이고 최선은 아니질 않는가.

제 덩치보다 더 큰 아이들이 짊어진 가방을 보면 마음에 돌이 들어찬 것처럼 무겁다. 공부 잘하는데 드는 값싼 가치 때문에 잘 놀아야 하는 귀한 가치가 너무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진정한 사랑은 집착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이다. 애착을 떼어내야 서로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놀이터 어머니의 걱정처럼 아이는 그리 약하지 않고 놀이기구 타는 방법을 스스로 알게 되기를 원한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부모는 그저 옆에서 잘 버텨주면 된다.

그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죽어라 공부만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던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공부를 잘하게 돼 행복할까, 행복하지 않다면 모든 아이들이 밤늦도록 학원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반문한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가 경쟁에서 이겼다고 행복할 일이 아니다.

경쟁이 과연 지금의 우리 삶을 풍성하게 했는지 되짚어보면 알 일이다. 경쟁 속으로 아이의 등을 떠미는 부모들은 부끄럽고 미안해야 한다. 시름 깊은 아이들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내 몰아야 한다.  

5월이다. 어린이날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그런 아이를 위해 축하와 관심을 지겹도록 주었던 모든 부모들이 너무 과하게 애착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에서 잘 버텨줬으면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멍이 들 권리가 있다. 맨 땅에 부딪혀 아프고 멍이 들어 상처가 아물어지는 과정을 겪고 나면 다음부터는 멍이 드는 일이 점점 줄어 들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강한 생존법을 체득한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5월 한 달만이라도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운동장에서 산에서 강에서 지겹도록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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