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만에 고향땅 밟은 안순덕 할머니
외갓집 없는
6남매, 볼 때마다 안스러워
‘창호야~’
힘없는 목소리만 허공에
맴돈다.
들뜬 마음에 밤잠을 설쳤지만 새벽녘 할머니의 고향자랑 이야기는 시를 낭송하는 젊은이처럼 낭랑하다.
점심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달려간 그 곳, 장전항.
63년만에 고향을 찾은 안순덕 할머니(83·사등면 언양리)는 오빠 안기호씨(생존할 경우 87세)와 4명의
동생들 이름을 차례로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부모님 슬하에 6남매가 살을 맞대고 살던 장전항도 2㎞ 남짓한 지척인데
63년간 애타게 그리던 가족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업어 키운 막내동생(생존할 경우 67세)이 그리워 ‘창호야~, 창호야’를 목 메여
불렀지만 끝내 대답이 없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니던 금강산 망양대도, 소꿉장난에 해가는 줄 모르던 해금강 모래밭도, 그리움에 애간장이
녹아든 삼일포 호수도, 어느 것 하나 변함없이,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거제신문과 세계항공여행사가 공동주관한 2박3일간(10월30일-11월1일)의 금강산 기행은 팔순이 넘은 할머니의 소원을 풀어준 뜻 깊은 행사였다.
83세의 안순덕 할머니(호적상 이름 김순덕). 그는 63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았다.
1944년 음력 12월8일 당시, 방년 20세였던 안순덕씨는 열살도 더 차이 나는 어장막이 기술자 남편 조병록씨(1963년 작고)를 따라 장전항에서 기차를 타고 3박4일의 긴 여정에 올랐다.
거제에 도착한 날은 12월12일. 그날은 시어머니의 제삿날이었다. 멋모르고 제사를 지낸 것이 며느리로서의 첫 역할.
그는 이후 3남3녀를 낳아 기르며 모진 풍파를 이겨야 했고 더구나 할머니의 남편은 겨우 19년간만 함께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39살에 홀로된 할머니는 다른 여성들이 괴로울 때 위로 받는 소위 ‘친정나들이’라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1950년 6월25일의 한국동란은 안 할머니에게서 고향과 부모형제를 앗아가는 불행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특히 할머니는 호적을 만들자니 부모님 호적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인근 김씨댁 수양딸로 등록해 할머니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붙이고 살아야 했다.
외갓집이 없는 6남매가 안스러워 그간 방송과 신문 등에 ‘이산가족 찾기’에도 수차례 신청했지만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이제는 가족을 찾는다는 희망은 버렸다. 오직 살아생전 고향땅이라도 밟아보고 죽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안순덕 할머니의 눈에는 시종,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어린시절 친구들과 소꿉장난 하던 해금강 모래사장에서 그때 그 모래알을 다시 만질 때도, 헉헉대며 올라가던 금강산 만물상이며, 오빠 동생 친구들이 함께 뛰놀던 장전항을 바라볼 때도 추억의 사무침은 끝이 없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여한(餘恨)이 없습니다. 김동성 대표님을 비롯한 거제신문사 여러분, 이금숙 세계항공여행사 지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친정 가족 누구라도 소식 한 번 들어 보는 것입니다.”
“기자 양반, 내 이름을 호적대로 김순덕으로 표기하지 말고 우리 형제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안순덕으로 써 주십시오.”
안 할머니의 미간엔 어느 새 희망의 미소가 감돈다.
가족의 상봉을 기대하며 우리 모두 안순덕 할머니의 건강과 소원성취를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