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학과 구문학
신문학과 구문학
  • 거제신문
  • 승인 2007.11.16
  • 호수 1
  • 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문학과 신문학의 차이되는 점을 모두 들어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편복의 관계로 다만 그 중 제일 현저한 몇 가지만 들어 말하려 한다.

1) 구문학은 귀족문학이오 신문학은 사회문학이다. 고대의 작자는 거의 전부가 귀족사회 출신이었고 독자도 대다수가 귀족이었다.

활사회의 경험이 부족한 작자가 사회의 소수 계급인 귀족의 독자를 위하여 쓰자니 자연 그네들의 재료는 가인, 재자-관리, 기녀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의 문체도 몇 천 년 전의 고동-사망체-그것이었다.

마치 서화나 조각이 그의 연대가 오랠수록 가치가 있는 것 같아 그네들은 그의 문체가 고식(古式)인 외에 되도록 고서 중에 궁벽한 문자를 많이 써야만 가치있는 문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문학은 이와 정반대이다. 그의 작자가 모두 활사회의 경험대학 출신인 외에 그네들은 사회전체-적어도 독서력 있는 민중전체를 위하여 쓴다.

따라서 관리 군인 학자 농부 공인 상인 인부 거지- 이 사회상 모든 계급 중 하나라도 그의 재료 아니 되는 것이 없고 그의 문체는 되도록 쉽게 주밀한 이상으로 경험의 부족함을 보조하는 것은 물론이나 조금도 자신의 직접 경험이 없이는 신문학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줄여 말하면 구문학은 실사회의 경험이 부족한 작자가 사회의 소수계급인 귀족사회를 위하여 쓴 귀족문학이요 신문학은 활 사회의 뭇 선례를 충분히 받은 작자가 사회의 대다수를 위하여 쓴 사회문학이다.

2) 구문학은 형식문학이오 신문학은 사실문학이다. 구문학은 그의 작자가 거의 사회경험이 부족한 귀족출신인 외에 몇 천 년 전의 죽은 문체, 내용과 사실이 부합되지 않는 고전을 사용하여 ‘문이대도’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 ‘권선징악’이라는 유일한 목표로 복잡한 사회 미묘한 인정을 그리려하였다.

따라서 그의 결과는 현대의 인물을 몇천 년전의 죽은 허수아비가 되게 하거나 또는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누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그네들은 의례히 ‘제봉이회’라 하고 누구를 기다렸다면 의례히 ‘수구이망’이라 한다. 명함을 주었다든지 봉을 그린 것은 그네들에게 조금도 상관이 없고 방에서 기다렸다든지 들에서 기다린 것은 그의 물을 바가 아니다.

심지어 그네들은 자기가 집생각 할 때라도 ‘왕찬등루’ ‘중선작부’라는 거짓말을 쓴다. 열녀 춘향은 반드시 암행어사로 출관한 이도령을 만나야 되고 효녀심청은 죽었다가 살아나서 왕후가 되고 자기의 부친을 만나야 된다. 그러나 신문학은 이와 반대이다.

그네들에게는 죽은 문체로 산사람을 묘사하여야 할 고통도 없고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여야 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문 이대로’ 라든지 ‘권선징악’같은 것은 그네들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한다.

풍부한 경험과 주밀한 이상을 가진 그네들은 다만 자유와 형식, 자유한 이상으로 복잡한 사회 미묘한 인정-사회와 인생의 모든 문제를 실제 그대로 그릴 뿐이다. 당송 팔 가문과 현대구미문학의 걸작을 비교하여 본다면 우리는 용이히 형식을 위주하는 구문학과 내용에 전력하는 신문학의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