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써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많은 애타는 세상에서, 그냥 와서 어느 사이 곁에 앉아버린 것들이 있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와버린 관계들이 그렇고, 버리기는 이제 아쉬울 각자의 위치에 대한 허망함이 가득 찬 요즘.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온갖 사건 때문에 상처 하나 없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힘과 힘만이 격하게 생존을 겨루는 사이 진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개인·학교·직장·단체·정부 할 것 없이 오랜만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가지 일로 소란스럽다. '나'는 없고 처단해야 할 '상대'만이 존재하는 혼란한 대한민국에 어느 사이 와버린 가을이 무색하다.
모두 끙끙 앓는 사이 하루아침에 정의가 바뀌어져 있기도 한다. 잘 정리해 수습할 겨를도 없다. 이익이나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하는 것을 농단(壟斷)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국가와 백성을 위해 교묘한 수단을 이용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철저히 특정인을 위한 농단은 분노를 넘어 온 국민을 허탈함에 빠트리고 말았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보고 아이들 입에서도 '순실'이란 이름이 회자되는 것은 참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어떤 것이 더 바르다고 알려주기 전에 팽팽하게 대립한 어른들의 감정을 풀어 보이는 것이 우선일 텐데, 그럴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이쪽 편의 한목소리는 다른 편의 다른 생각과 부딪혀 격한 마찰음만 시끄럽고 틈 없이 맞닿아 뭉개져 내린 서로의 가슴이 더 아프다 외칠 뿐이다.
"보시오, 내가 더 다쳤으니 저쪽이 잘못한 거 아니오."
그렇게 저울질 된 아픔은 다시 상대를 공격할 무기가 되고, 끝없는 대립으로 끝내 모두 풀썩 주저앉고 말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진솔한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옳거나 그르거나 상관없이 자신이 움켜지고 있는 기득권이 무너질까 두려울 뿐이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모았고 지켜야 할 재산·권리·위치적 존재가 왜 중하지 않을까,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있지만 과도한 얽힘과 집착으로 인해 서서히 파멸해 가기 마련이다.
곧 이 가을이 가면 잎이 떨어지고 잎 끝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이슬도 함께 떨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떨어지는 이슬을 감상하기도 전에 아예 숲 전체를 갈아 엎어버리려는 작금의 사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지위에 부끄럼 없어야하고, 여당과 야당은 정쟁을 그만 두고 걸 맞는 책임감으로 혼란을 없애야 하고, 사정기관은 공명정대하게 좌·우 치우침 없이 판단해 국민의 심정을 헤아려야 할 때다.
국정농단 의혹은 완전히 해소돼야 하고, 관련된 사람의 비리는 숨김없이 밝혀 단호하게 처벌돼야 비로소 국민이 아픔없이 가을을 즐기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손손 맞잡은 촛불은 큰 횃불이 될 것이다.
색 좋게 물든 잎 하나라도 더 자세히 봐야 하고, 그 잎 떨어지기 전 그리운 사람의 생각으로 종일 가슴 뜨거워지고 싶은 가을이다.
아름다워야 할 사람의 자연스런 감성이 정치에 짓눌리고 거짓에 구타당하는 대한민국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염려한다. 그 발걸음들에 얽혀 있는 여럿 마음들이 적어도 이 가을에는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은 마른 꽃잎들과 설마른 꽃씨들의 행방을 염려하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때이다. 차갑고 단단해진 공기를 훅 들이 마시고는 뜨거운 여름동안 무뎌진 속을 담금질해야 다가오는 겨울을 잘 견딜 수 있으리.
버리기에는 너무 와 버린 11월이다. 은빛 머리 하늘거리는 갈대가 아름다운 계절, 아주 뜻밖에 친순한 친구가 찾아와 고현시장 뜨거운 국밥에 막걸리를 실컷 말아 넣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