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의 유일한 용어는 영어이고 불문학의 유일한 용어는 불어인 것 같이 우리말은 우리문학의 유일한 용어이고 현대의 우리말은 우리 문학의 유일한 용어(用語)이다.
‘온’, ‘즘’, ‘골’, ‘잘’, ‘가뭘’, ‘검’… 같은 것은 고대(古代)의 우리말이나 이미 없어지고 만 것이니 현대문학의 용어로 널리 쓸 수 없고 ‘뽈’, ‘람프’, ‘라켓’, ‘카스테라’… 같은 것은 외국말이나 현재 우리말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니 물론 우리문학의 용어로 쓸 수 있다.
다만 ‘도합(都合)에 의(依)하야’, ‘대층면백(大層面白)’, ‘어중(御中)’, ‘전(殿)’, ‘양(樣)’, ‘장합(場合)’… 같은 무의미한 직역은 우리문학의 용어로 쓸 수 없나니 그것은 의미가 통하지 못할뿐 아니라 우리에게 ‘사정(事情)으로 인(因)하야’, ‘대단자미(大端滋味)’, ‘귀중(貴中)’, ‘좌하(座下)’, ‘형(兄)’, ‘ 경우(境遇)’… 같은 훌륭한 우리말이 있는 까닭이다.
고유한 우리말이 있는 것은 우리말로 쓰고 만일 없다면 되도록 새말을 짓되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국말도 쓸 것이다.
우리는 고대의 우리 조선(祖先)과 같이 ‘자기(自己) 말을 상(常) 말이라’하여 점잖은 남의 말을 취할 필요도 없는 동시에 이미 자기 말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외국말을 극단으로 배척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우리는 ‘우리 문학은 우리말로 현대의 우리문학은 현대의 우리말로’ 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이 원칙에 위반되는 모든 문체는 하로라도 더 존재할 가치가 업다’는 단언을 할 수 있다.
소위 국한문이라하여 현재의 우리 출판계에 대 유행을 하고 있는 혼용문은 비단 이 원칙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한문도 아니오 국문도 아닌-말하자면 ‘후로코트’에 정자관(丁字冠) 쓴 것 같이 부자연한 문체이다.
‘I 가 Go to School 하다’하면 대소절창을 하는 그네들이 ‘我 가 學校 에 往하다’라고 써 놓고 득의양양 하는 것을 보면 습관의 힘이란 역시 위대한 것 같다.
영문(英文)은 영문(英文)이요 불문(佛文)은 불문(佛文)인것 같이 국문(國文)은 국문(國文)이니 결코 혼용하여서는 아니된다.
삼천년 전의 고동(古董)-죽은 한문을 현대의 우리말로 채색시켜 신문체가 되리라고 믿는 것은 사천년 전의 목내이(木乃伊)에 20세기의 옷을 입혀 살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꼭 같은 망상이다.
또 이뿐 아니다. 신문학은 평이(平易)를 위주하는 사회문학인 이상 우리는 ‘채신지우’, ‘재봉이회’, ‘고분지통’… 같은 자의(字意)와 어의(語意)가 부합(符合)되지 않는 고전(古典)을 일체 사용치 아니하여야겠고 신문학(新文學)은 내용을 위주(爲主)하는 사실문학인 이상 우리는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고요한대 참새는 지저우고 꾀꼬리 노래하니…’ 같은 한문(漢文)의 대법(對法) 그대로를 모방한 병문식의 문체는 전부 폐기하여야 겠다.
줄여 말하면 신문학 건설운동의 제일보(第一步)는 우리 현대의 언어와 부합되지 않는 모든 문체-난해, 부자연한 모든 문체를 전부 폐기하고 우리 현재의 언어를 표준하여 쉽고도 자연한 새 문체를 건설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