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람 중에 한 분이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다.
백범에 대하여 인물사전은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몇 가지로 엇갈린다.
남북의 분열을 저지하려고 애쓴 민족주의자, 국제 현실에 어두워 결과적으로는 분단을 고착시킨 장본인, 남과 북의 정치 세력에 이용만 당한 로맨티스트 등이다.
그러나 앞으로 발행될 10만원권 초상인물로 선정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32세의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安斗熙)가 쏜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다.
안두희는 범행 직후 특무대로 연행되었으나 배후 없는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어지고 종신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석달 후 징역 15년으로 감행되고, 이듬해 6·25가 터지자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아 포병 장교로 복귀한다. 1951년 잔형면제와 더불어 대위로 예편되고, 1953년에는 완전 복권하게 된다.
민족지도자를 암살하고도 아무 일 없었던 듯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이해 못할 일이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법은 자객을 풀어주었지만 세상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안두희를 뒤쫓는 추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숨어 지내야 했다. 그의 확실한 천적은 권중희(權重熙)씨였다.
1987년 숨어 지내던 안두희를 찾아내어 폭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에 알려졌고, 92년에는 백범의 묘소 앞에 끌려나와 통한의 눈물을 쏟게 만들기도 했다.
안두희는 백범을 암살한지 47년이 지난 1996년 10월 23일 인천에 있는 그의 집에서 버스 운전기사 박서기(朴琦緖)에게 몽둥이로 맞아죽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도 끈질기게 안두희를 추적하던 권중희 역시 지난 11월 16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김구-안두희-권중희로 이어지는 1막 3장의 역사는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한다. (san109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