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을 맞이하여 부엌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 여기저기 정리하다보니 유기 그릇 몇 점이 눈에 띄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온 집안 여인네들이 모여 유기그릇, 일명 놋그릇을 마당에 펼쳐놓고 짚을 수세미 삼아 연탄재를 묻혀 그릇을 닦던 것이 떠올랐다.
시커멓게 녹으로 얼룩져 있던 놋그릇이 수세미질 몇 번으로 황금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또 놋그릇에 비벼 먹던 제삿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나도 올 여름엔 수세미로 놋그릇을 박박 닦아서 사용해보기로 했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놀러 온 누군가가 내가 유기그릇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유기그릇의 장점에 대해 한마디 했다. 대장균의 일종인 O-157 균을 죽인다나. 어쩐다나. 그래? 기특한 그릇이네. 생각난 김에 유기그릇의 장점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한번 해보았다.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먼저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도가니에 녹인 엿물로 바둑알과 같은 둥근 놋쇠덩어리를 만든다. 이 덩어리를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여러 명이 서로 도우면서 불에 달구고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를 만든다. 주물 유기와는 달리 정확히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비교적 변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가 나는 장점이 있다. 또한 방짜는 독성이 없으므로 식기류를 만들 뿐만 아니라 징·꽹과리 같은 타악기도 만든다. 특히 악기는 방짜기술만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 손꼽힌다.
방짜유기는 우리 조상의 얼과 지혜가 함께 녹아 만들어진 산물이다. 유기그릇에는 해충을 쫓아내는 신비한 효능이 있으며, 미네랄을 생성하며 멸균 효과도 탁월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에 붙어 처치 곤란한 거머리를 놋수저로 물리쳤다고 한다. 십 수 년 전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O-157균을 방짜유기 안에서 배양했더니 하루도 안 돼 모두 사멸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구리와 주석의 합금일 뿐인 금속에서 어떻게 이런 효능이 나오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담금질과 두들김에서 생긴 금속의 성분 변화라고 보고 있다. 1200도가 넘는 고온과 차가운 물 사이를 수 백 번 담금질 당하고 수 천, 수 만 번의 두들김 끝에 구리가 가지고 있던 성분과 주석이 가지고 있던 성분이 합해지고 변해서 무공해 금속이 되는 것이다.
일반그릇은 소금이나 간장을 오래 담그면 변질이 되지만 방짜 유기는 여러 날이 지나도 그대로인 이유이다. 심지어 농약이나 인체에 해로운 가스 등 독성 물질에 반응하고 보온, 보냉 효과 또한 탁월하다.
나는 오늘 방짜유기의 탁월함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주석은 잘 깨어지는 성분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구리와 합쳐져서 새로운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인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거듭되는 망치질과 반복적인 열처리가 방짜가 깨지지 않는 비밀이라고 말한다.
주석은 무르기는 하나 열에 강한 물질로, 달궈져 있는 한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데 지속적인 열처리로 주석의 취약한 성질을 극복한 후, 망치질로 주석을 잘게 부숴 흐트러뜨려 깨지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을 생각한다. 우리들 각자는 나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좋은 성품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면체인 우리는 누구나 한 가지 쯤은 자신만이 아니는 아주 고약한 성품, 태도 혹은 가치관이 있을 수 있다. 사람에게도 담금질과 두들김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품을 끊임없이 뜨거운 불속에 집어넣어 담금질하고 나를 끊임없이 두들기고 망치질해서 체질이 녹아 전혀 다른 순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줄 담금질과 두들김 말이다.
끊임없이 우리는 달궈져야하고 두들김 당해야한다. 그래야 변한다. 그래야 바뀐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만족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나처럼 타고난 어떤 성품이 불만족스럽다면 우리의 주변 환경이나 사람이 나를 담금질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두들겨지고 망치질 당해서 둥글고 쓰임새 있는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 어떤 고난에도 흐트러지거나 깨지지 않는 그릇으로 거듭나는 것. 나는 오늘 수 천 번의 담금질과 두들김 끝에 새로운 성분으로 거듭난 유기그릇 하나에서 그 원리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