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삼절(松都三絶)
송도삼절(松都三絶)
  • 거제신문
  • 승인 200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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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都)는 고려조의 왕도(王都)였던 개성(開城)의 별칭으로 개성 뒷산이 바로 송악산(松嶽山)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때는 송악군으로 불리다가 태조 왕건이 도읍할 때는 개주(開州), 고려 광종 때 비로소 개경(開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조선 성종 때 개성부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송도라는 이름이 송도삼절의 느낌 때문에 훨씬 풍류가 있어 보인다.

19세기에 간행된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中京誌)」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의 학문, 박연폭포의 절승경계, 탁월한 여류시인이자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황진이의 용모를 일컬어 송도3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담은 야인으로 살다간 학자로 그의 성리학 요체는 주기일원론 (主氣一元論)이다. 이(理)보다는 기(氣)에 중심을 두는 독창적인 기철학(氣哲學)은 조선 성리좌파의 시조라고 부를 수 있다.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높이 37m, 너비 1.5m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는 직경 40m나 되는 고모담이라는 큰 못이 있다.

현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88호다. 황진이야 더 무슨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소설이나 드라마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황진이가 30년을 면벽수도(面壁修道)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켰지만 화담과는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연모하는 사이로 설정된 것은 당시 성리학이 불교보다 훨씬 우위였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송도3절이야 조선의 것이지만 송도의 정신은 선죽교(善竹橋)에 있다. 본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로 작은 개울의 다리에 불과했지만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趙英珪)의 쇠망치에 맞아 죽은 후 지워지지 않는 핏빛과 대나무 때문에 새로 얻어진 이름이다.

개성관광이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요즘 우리는 개성하면 개성공단이 먼저 떠올리지만 기실 개성의 자랑은 도시에 숨쉬고 있는 역사의 뒤안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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