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윤석중 선생의 동시 '우산'에는 올망졸망한 동심이 묻어난다.
시인 김수영(1921~1968)에게는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 때 / 우리들의 옆에는 / 어린놈이 울었고 / 비오는 거리에는 / 40명가량의 취객들이 / 모여들었고…'라는 시 '죄와 벌'에서 보듯 무서운 폭력도구가 된다. 그런 탓에 지금도 비행기를 탈 때 우산은 기내로 반입할 수 없다.
우산은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발명돼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당시 우산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이집트에서 귀족신분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중세 유럽 가톨릭교회는 권위의 상징으로 우산을 사용했는데, 평민들은 르네상스 초기까지 감히 우산을 사용할 수 없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신사라면 비와 관계없이 우산을 들고 길을 걷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그러던 우산이 일상생활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스포츠가 성행하게 된 19세기 이후다.
우리나라는 왕이나 수령의 행차 때 색깔을 달리한 일산(日傘)을 사용했지만 평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는 것'은 불경이라 여겨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우장(雨裝)으로 대오리나 갈대로 엮은 삿갓·짚으로 만든 도롱이,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우산은 조선말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종이에 기름을 입힌 지우산(紙雨傘)을 일본문화라고 여기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편견은 기모노를 입고 종이우산을 펼쳐든 여인상이 일러스트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고, 특히 화투의 비광에 우산이 그려진 영향이 크다.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대살에 청비닐을 덮은 우산이 있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값으로, 한번 쓰면 버릴 정도로 내구성은 없었지만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비닐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우산 사려" 하며 외치던 장사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