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야생화를 좋아한다. 가꾸어서 피는 화려한 화초보다 수더분한 들꽃이 좋다. 야생화 중에서도 동강할미꽃이나 변산바람꽃, 복주머니난(蘭)과 같이 귀하게 취급 받는 꽃들은 흔치 않아서인지 보기도 어렵거니와 이름조차 낯설다.
그에 비해 쑥부쟁이와 구절초, 심지어는 개망초는 계절따라 한적한 길섶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들꽃이다. 떨기바람에도 온 몸을 간질어대는 여린 꽃들의 정감어린 몸짓이 좋은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자운영이다.
어렸을 때 들녘에 지천으로 보이던 풀이었는데 요즈음은 영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라진 풀은 아니지만 눈여겨보아야 볼 수 있는 풀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아쉬움이 더해서인지 자운영에 마음을 뺏겨버린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논 가득 피어 꽃내를 훅훅 뿜어내는 자운영 밭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라치면 들판에는 일렁이는 홍자색깔의 나비 떼가 저리도 숱하게 날아오를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운영의 꽃말이 '그대의 관대한 사랑'이다. 대부분의 꽃말들이 꽃의 생김새에 비유해 붙여지지만 '관대한 사랑'은 쉽게 그 느낌이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관대함'이란 말 속에는 넉넉함과 희생이 담겨있다.
넉넉하다 함은 무리지어 피어오름을 말함이요, 희생은 못자리철이 되면 꽃이 채 지기도 전에 퇴비용으로 갈아엎어지게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닐지. 이렇게도 예쁜 꽃이 단지 거름이 되기 위하여 가꾸어 지는 것이라니 가엾고 안타깝다. 모내기 전 빈 논을 가득 채웠던 자운영이 가장 아름다울 때 땅속으로 묻히는 눈물겹게 슬픈 꽃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고 결국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촛불 같은 꽃, 제 한 몸 희생하여 흙을 기름지게 하다니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관대한 사랑을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자기 사는 일에만 열중해서 타인에게 눈 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과연 자신에게가 아닌 타인에게 저토록 관대해질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다.
베란다 창가에 앉아 건조대의 빨래들이 허수아비가 되어가는 것을 한가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절기상 우수(雨水)가 지난지도 벌써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지만 머잖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봄의 들판 어디에서는 자운영이 꽃을 피우고, 그 꽃들은 홍자색 날개를 펼친 나비 떼가 되어 구름처럼 무리지어 꽃잎처럼 흩날릴 것이다.
작은 욕심 하나가 생겼다. 마당과 텃밭이 딸린 작은집을 짓고, 그 텃밭 한쪽에 자운영을 심고 때가 되어 꽃이 피면 질 때까지 두고 보고 싶다. 더불어 먼 훗날 주름살마저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면 봄볕 아래서 자운영 꽃으로 만든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