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 경
풍 경
  • 거제신문
  • 승인 2008.01.10
  • 호수 1
  • 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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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위숙 수필가

미명을 더듬는다. 지난밤, 예사롭지 않았던 바람의 소란은 마치 꿈이었다는 듯 새벽의 얼굴이 말갛다.  천천히 해를 밀어 올리는 바다의 육중한 어깨도 보인다.

해돋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빛이 아직 바다에 당도하지 않은 시간, 앞 바다의 작은 섬은 새벽안개 속에 잠겨있다. 겨울 들판의 마른 풀잎들은 서릿발을 고스란히 머리에 인 채 해를 기다린다.

서서히 해가 떠오른다. 해는 단아하고 고즈넉하다. 저 멀리서 떠오르는 작은 불덩이가 땅과 바다를 비춘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새날을 알린다. 조용히 해를 받고 사라지는 산파 같은 새벽에게 나는 힘겨웠던 지난 한 해를 업혀 보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대문을 열고 나와 새날을 맞는다. 빛이 가장 먼저 드는 양지말, 해가 가장 늦게 뜨는 음지마을인 틈실, 겨우 다섯 가구 사는 아랫뜸에서도 소박하고 순박한 사람과 살림살이들이 볕을 받는다.

폐가로 남아 있는 붉은 양철집 마당에도, 문 닫힌 교회 창가에도, 팽나무 속 새둥지에도, 집집 서릿발 내려 허연 장독대와 연하장이 꽂힌 우편함에도 아침볕이 따스하다. 살며시 뒷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집 방안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온다. 댓돌엔 할머니의 털신 한 켤레만이 가지런하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강아지들의 소리가 소란스럽다. 그 소리에 대숲에 몸을 숨겼던 새들이 후루룩 흩어진다. 대숲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을을 빠져 나온다. 바닷가로 향하는 산길에는 쭉쭉 뻗은 소나무가 하늘 끝까지 닿는다.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길섶에 고여 있던 마지막 안개가 내 발길에 자취를 감춘다.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아이의 손처럼 햇빛이 나무 사아사이를 파고든다. 어깨에 얹힌 삭정이를 툭툭 털어내는 소나무들, 그 솔가지 더미에 다시 묻히는 숲길. 몇 십 년을 넘나들었다는 소나무 숲은 그 고즈넉함이 가볍지 않다. 마음 안쪽까지 편안하다.

솔숲을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간다. 밤새 몸을 키운 바다를 만난다. 고깃배들이 붐비기 전 포구는 조용하다.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방파제 끝에 선 하얀 등대가 뱃길을 밝히고 집어등을 켠 배들이 수평선을 수놓는다.

밤새 잡은 고기와 해산물들을 실은 배들이 속속 도착한다. 그러면 포구의 새벽은 배들이 내뿜는 엔진 소리만큼이나 박력 있다.

혀를 재게 놀리어 보통사람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경매가 끝나고 나면, 포구의 왁자함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까닭에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고 시장기가 느껴진다. 뜨끈한 국물로 몸을 덥힌다.

그러고 나서 포구 구경에 나선다. 포구에서는 무엇보다도 말 섞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는 두서가 없지만 그 속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을 견디며 허리를 굽힌 채 해산물을 손질하는 할머니들을 마주하면 ‘인생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한동안 떠나질 않는다. 햇볕이 잘 내려앉은 한쪽 구석에서는 그물 손질이 한창이다. 어부들의 바지런한 손놀림 모습 역시 가장 원시적이고 거룩한 노동의 풍경이다.  

포구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어선 귀퉁이에 앉아 어부의 그물 손질이  끝나기를 갈매기들은 기다리고 있다.

힘겹게 먹이를 잡는 것보다 얻어먹는 것이 편한 갈매기다. 행여 그물에 찢겨 팔기 힘든 고기라도 던지면 재빠르게 낚아채 간다. 더 이상 갈매기는 높이 날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가장 일찍 깨어나지도 않는다. 포구에 더부살이로 얹혀 있을 뿐이다.

포구는 그 이름만으로도 살갑지만 주변에 유려한 풍경을 거느린다. 크고 작은 갯바위와 파도가 만들어 내는 풍치에 마음이 쓰인다. 파도가 거세게 이는 날, 갯바위가 부서져라 몰아치는 파도는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마음속에 든 갑갑증이 저만치 물러선다. 고깃배가 들어오기 전 침묵하는 포구의 한적함, 만선의 기쁨으로 북적거리는 포구의 생명력, 포구에서는 극과 극의 풍경을 만난다.

썰물이다. 바다는 물을 밀어내고 알몸이 된다. 한나절은 바다가 되었다가 또 한나절은 뭍이 된다. 개펄이다.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개펄인지 경계를 알 수 없는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바다에 이른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시커먼 진흙탕일 뿐이다.

햇살 받아 윤기 흐르는 절반의 땅을 만져본다. 다가가 살을 맞대는 순간 무수한 생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것이 움츠러드는 한겨울 칼바람에도 쉼 없이 꿈틀대는 개펄의 생명을 몸으로 느낀다. 바닷새들이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날아다닌다.

썰물 뒤에 드러난 개펄은 바다가 허물처럼 벗어두고 간 결이다. 그 결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때 잘 드러난다. 버려진 땅 후미진 구석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개펄에서 삶의 바닥을 본다.

작은 배들이 바닥으로 긴 흔적을 남긴다. 질척이는 흙에 몸을 뒹굴며 건져 올린 갯가 사람들의 삶을 본다. 그 풍경 속에 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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