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봉 전 거제경찰서 정보과장 둘째 딸
옥포동 출신 신인작가 이제니씨(37) 시 ‘페루’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2008 경향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본선심사에 오른 10명의 작품 가운데 당선작으로 선정된 ‘페루’는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지만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는 평가다.
평가위원들의 심사평에 따르면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며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 더 힘차길 기대한다고 평했다.
특히 ‘페루’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고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당선소감을 통해 “아버지께서 물려준 타자기로 10살 무렵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며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 준 어머니와 좋은 화가이자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와 동생들,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 준 초등학교 국어선생님께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고 말했다.
제니씨는 장승포초등학교와 거제중학교를 졸업하고 거제고를 거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으며, 거제경찰서 정보과장 등을 역임하고 산청경찰서장으로 퇴임한 이창봉 전 서장의 둘째딸이다.
[2008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루’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