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血)의 연(緣)
혈(血)의 연(緣)
  • 거제신문
  • 승인 200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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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원시사회 사람들에게는 성(姓)이란 게 없었다.

그냥 혈연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점차 씨족의 범위가 늘어나자 자기 구역에 대한 사람들을 표시하기 위해 산이나 강을 비롯한 그들만의 특징을 표식으로 삼게 된다.

이후 중국으로부터 한자가 전래되면서 한자식 성으로 바뀌지만 그렇다고 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려 태조가 자신에게 협력한 호족들에게 사성(賜姓) 형태로 지역을 근거한 성과 본관을 내리면서 사실상의 성씨제도가 정착하게 된다고 보아진다. 백성(百姓)이란  백 사람에게 성을 주었다는 뜻으로 국가가 성을 관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조선초기에는 사대부와 평민이 성을 가질 수 있었다면, 후기에는 천민까지 확대된다. 이렇게 되자 16세기 이후 조선의 사대부는 성의 유무만으로 가문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족보(族譜)라는 시스템을 통해 차별화를 시도한다. 족보가 곧 양반을 의미하면서 조선후기는 혈의 연과 관계없는 가짜족보의 시대가 되고 만다.

족보와는 다르게 역대 국가에서는 부세(賦稅)·요역(?役) 징발 및 민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호구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호구파악 공문서가 신라시대 장적(帳籍)이다.

이후 공문서로서의 호적(戶籍)은 법적개념을 떠나 가(家)의 계보, 즉 작은 족보와 같았으며, 호적에서 빠진다는 것은 혈통으로부터의 이탈로 더 이상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호적제도는 일제시대 징병이나 징세, 또한 독립군의 색출을 위한 방법으로 자기들의 호적제도를 그대로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 작은 족보로서의 호적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가족관계등록부라는 새로운 이름의 호구문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1월 2일부터 겨우 6일간 새가족제도에 따른 자녀의 성(姓)과 본(本)을 바꿔 달라는 변경허가 청구건수가 무려 1,472건에 달한다니 이제 혈(血)로 이루어지는 연(緣)이란 그 정체성조차 의심스러워지고 말았다.(san10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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