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600년의 꿈
불타버린 600년의 꿈
  • 거제신문
  • 승인 2008.0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유력한 후보지였던 계룡산은 천하명당이긴 하지만 물길이 북쪽으로 역류하고 있어 제외되었다. 따라서 한양이 수도로 선택된다.

그러나 정작 궁궐터는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진산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두고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학자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을, 하륜(河崙)은 모악산을, 정도전(鄭道傳)은 북악산을 고집했다. 북악산 아래는 남향인데다가 터가 넓어 좋긴 하지만 정면에 관악산이 있어 화기(火氣)가 우환이었다.

그러나 실세였던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주고 있고, 불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동물 해태상을 관악을 향해 세우고, 뿐만 아니라 사대문(四大門)의 주문인 남문(南門)에 불길모양의 숭(崇)자를 넣어 숭례문(崇禮門)으로 하고, 현판은 세로로 세워 불길모양으로 하여 맞불작전을 쓰면 된다는 논리로 관철시킨다.

중국처럼 광활한 땅에서는 명당을 찾는 일이 풍수라면, 좁은 땅을 가진 우리에게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명당이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풍수는 부족한 부분을 더하거나 지나친 곳을 덜어내는 비보(裨補)사상이 중요한 요체다.

궁의 동쪽기운이 약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청계천 공사로 얻은 흙을 퇴토(堆土)하고, 흔히 동대문으로 불리는 「흥인문」에 산을 의미하는 지(之)를 더 보태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한 것이 좋은 예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정문으로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 홍예문을 두고 그 위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일제는 민족문화의 말살을 위해 전차 노선을 통과하게 했고, 광복이후에는 국보 1호에 대한 교체논란으로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저녁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수준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거의 밤을 새우며 화재진압 현장을 지켜봤던 우리의 가슴이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르겠다. 복원된다 해도 숭례문은 영원한 짝퉁일 뿐이다.(san1090@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