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은 우리민요다. 언제부터 불리어져 왔는지, 그 뜻이 어떤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우리민족은 누구나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요즘은 유행가를 비롯해 팝송 등 많은 노래가 있지만 예전에는 우리민요가 입으로 전래되어 누구나 즐겨 불렀다. 한일 합방 후 우리말 우리문화 말살 정책에도 아리랑은 민족의 혼으로 이어져 왔다.
그 당시는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리랑이었을 정도로 누구나 쉽게 불렀던 노래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가사와 곡이 약간씩 다르긴 해도 그 맥은 같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런 차이는 감정과 여건에 따라 변하면서도 아리랑 그 자체의 곡은 큰 변화가 없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기에 가사를 만들어 곡에 맞추어 불렀다. 가사나 곡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같은 노래를 불러도 사람마다 애절한 감성은 다르게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의 민요는 민족의 한을 표출한 서민대중의 노래라 했다. 그런 노래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현대 문화에 밀려나 우리민족의 정신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말을 배우기 전에 깡충깡충 뛰면서 할머니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아리랑은 슬플 때나 괴로울 때 나도 모르게 자주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면 부모님 생각이 나고 고향이 그리워진다. 조국의 노래요 민족의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을 즐겨 불렀던 당시는 어렵고 못살던 때였다. 그래서 그 노래가 더 애절 하였던 것 같다.
아리랑은 이별의 노래다. 사랑하는 임을 보내면서 불렀던 노래다. 가사 자체에서도 나타나듯이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떠나는 임을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애절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아리랑을 좋아해서인지 나에게는 지난날의 슬픈 사연이 아리랑으로 메아리쳐온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 다음해였다. 계속된 흉년에 실농을 하고 양식이 떨어졌다.
양식걱정을 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호롱불 아래서 우리형제들을 바라보시면서 부르시던 아리랑은 절망을 이겨 내시려는 한숨과 비탄의 소리였다.
새벽닭이 울 때 아버지는 아리랑을 부르시며 장사 길에 나섰다. 가뭄이 계속되어 타버린 전답처럼 타 들어 가시던 부모님의 심정은 생각지 않고,
“운동화 하나 사다 주이소.” 하고 사리문 밖까지 따라 나갔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고개만 끄떡하시고 아리랑을 부르시며 어두운 언덕길을 올라가시었다. 해가 저서야 돌아오신 아버지는 보리쌀 서너 되와 검은 운동화 한 켤레를 사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그 비싼 운동화를 사 왔다’며 불평이다.
당시 운동화 한 켤레 값은 보리쌀 한말 값이다. 운동화를 볼 때 마다 아버지가 부르시던 아리랑이 들여온다.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애쓰시며 굽으신 등허리에 장날마다 봇짐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새벽닭이 울 때 집을 떠나시면 어둠이 져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산 고개를 넘어 오시며 아리랑을 부르신다. 그 소리를 들어야 어머니는 안심을 했고 우리형제는 좋아했다.
차비가 아까워 왕복 60리길을 발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시고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봇짐 속에는 언제나 공책과 연필이 담겨있었다.
그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주먹밥 한 덩어리로 점심을 때우시고 길가 우물로 배를 채우시며 자식들 위해서 한품이라도 아끼며 고생 하시었다.
아버지의 아리랑은 우리들 가슴에는 언제나 정이 솟아나게 했고 희망을 주었다.
고향을 떠나 섬 마을에서 살 때 아버지가 오셨다. 단칸방에 살 때다 아들 손자 며느리가 한방에 누었다.
따뜻하고 포근했던 하버지의 살결이 차갑고 거칠었다. 우리형제 키우시느라 온갖 풍상 다 격어시며 살아오신 사랑의 흔적이다. 아버지 손을 꼭 잡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오신 아버지를 위해 집사람이 마련한 아침 밥상은 단조롭긴 해도 정이 넘쳤다.
아침밥을 잡수시고 아버지는 집을 장만하라며 돈을 내어 놓으신다.
“비산 골에 있는 논을 두마지기 팔아 왔다. 모자라면 더 보내 주마” 하신다.
“아버님 ! 오늘은 거제 구경하시고 쉬었다 가이소” 하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으시고, “우리가문에 시집와서 고생이 많다. 욕심내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하시며 떠나시는 뒷모습이 너무나 애처러웠다. 그 길이 거제의 마지막 길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돈으로 작은 집을 마련하여 집 사람이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우리내외도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위해서 근검절약 하면서 부지런히 살았다. 자식 낳고 살아보니 아버지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내외도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을 쏟으면서 억척같이 살았다. 재산이 솔솔 불어나는 재미에 너무 무리를 하여 아내는 병을 얻었다. 살만 해지자 사십대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아내를 안고 애절하게 불렀던 아리랑이다.
그 다음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고향 선산으로 오르는 꽃상여의 상두소리가 아버지가 부르시던 아리랑으로 승화되어 멀리 멀리 살아져 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