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라는 짧은 수필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새삼 오늘 그 내용이 떠오른다.
현실과 맞서지는 못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나약한 지식인이 그를 타박하는 부인에게 ‘사회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고 했던 변명조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 자신도 같은 부류가 아닌가 싶어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서민들의 애환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 술이고, 술이 없었다면 아마도 인간세상은 또 다른 모습의 파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범죄를 저지른 많은 사람들은 술을 핑계 삼는다. 술에 취해서 폭행을 하고, 운전을 하고 심지어 살인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변명을 수시로 들어오던 어떤 판사는 재판 도중에 혼잣말로 “술을 구속할 수도 없고…”라고 탄식을 내 뱉었다고 한다. 술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달래주는 역할도 하지만 한편으론 범죄로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작가들은 술을 통해 사회를 다르게 바라보기도 한다. 80년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시인은 ‘노동의 새벽’이란 시에서 힘든 철야노동으로 지친 육체와 영혼을 소주 한잔으로 달랬던 노동자들의 애환을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에 찬 소주를 붓는다’고 노래했다.
반면에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시인 박목월은 ‘나그네’에서 일제시대의 암울한 민족현실 앞에서도 유유자적(?)하는 나그네를 통해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감상했다.
그의 시에는 어디에도 당시의 아픈 서민들의 생활이나 민족의 현실은 찾아볼 수 없다. 작품성을 떠나 같은 술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두 시인은 전혀 다른 곳에 눈길을 주었다.
시인 조지훈도 평생을 술을 벗 삼아 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조지훈 선생은 술을 바둑처럼 급수와 단수로 나누어 비유한 적이 있다. 그 최고봉을 술이 좋아 저 세상으로 간 단계로 주선(酒仙)의 경지라고 표현했다. 술과 함께 신선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술은 민족성, 기후,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그 소비량도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 정치적으로 불안하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더 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술 소비량은 그 사회의 또 다른 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정부의 첫 장관들은 한결같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거나 학위 논문을 표절하여 국민의 질타를 받는가 하면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변명으로 국민을 우롱했다.
국민으로 하여금 그들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게 했다. 총선을 앞둔 정치판도 구태한 계파정치가 판을 치고 철새 정치인들이 날개를 펴고 있다. 이 또한 우리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는 이유다.
경제는 어떤가? 기름값을 비롯하여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농업과 농민들은 한미 FTA 체결로 인하여 그 근본까지 흔들릴 상황에 와 있다. 소주 한 잔이 위안일 것이다.
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 잔 술을 찾는다. 상가(喪家)에서는 한 잔 술이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약이 되고, 잔칫집에도 축하의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다.
그래서인지 술 한 잔이 먼 친척보다 낫고, 하늘같은(?) 정치인보다 한 잔 술이 국민을 더 이해해 준다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오늘밤에는 벗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그러다 만취하여 소위 필름이 끊어져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누군가로부터 타박을 듣게 되면 이 한마디는 해야겠다.
“사회가 술을 권해서 한 잔 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