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 광고를 접할 때마다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됩니다. 그 광고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학교 학원 독서실 집…, 하루 15시간을 책상에 앉아있었습니다. 37권의 문제집을 풀었고, 20권의 연습장을 다 썼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상자에 넣어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광고는 우리가 흔히 갖고있던 문장의 연결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반전이라고 불리 울 수 있는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의당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성공했습니다’가 이어져야 할 텐데 여기서는 그 기대를 뒤집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저버려지는 순간 저는 묘한 쾌감을 맛보고 오히려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사회가 이 아이를 기다려줄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게 참 빨라진 시대입니다. 그것은 비단 교통 통신망의 빨라짐 뿐 아니라 인간 삶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도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입시지옥이라고까지 불리우는 대학입시의 과정에서, 인생의 초반 아직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삶 그 자체를 배워야 할 나이의 어린 학생들이 ‘낙오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과정을 물을 여유도 없습니다.
결과만으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는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실패로 이어지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에 우리의 사회는 너무 바빠졌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흔해진 사회에서 실패자를 기다려줄 여유를 기대한다는 게 무리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사건입니다. 과정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완벽한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가신다던 분이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보고 어느 누구가 성공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오늘 우리에게 사흘이란 철저한 죽음의 시간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러한 실패를, 그러한 철저한 포기의 상태를 지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 부활하실 주님을 기다릴 여유가 있는가 입니다.
이 기다림의 마음을, 실패를 절망이라 부르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꿈꾸는 자의 마음을 저는 부활신앙이라 불러보고 싶습니다.
<산과 들, 바닷갉, 매일매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이 따랐고, 때론 5천이 넘는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고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무덤을 막아놓은 돌문을 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 다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