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가 대구 사람이라 대구의 한 교회에서 혼례식을 올린다는 것이다. 약속 장소에서 대절버스를 탔다. 차 안은 빈 좌석이 하나 없이 만원이었다.
겨울 날씨인데도 차 안은 사람의 온기로 후텁지근하여 에어컨을 켜가며 속도를 내 달렸다. 주말의 교통체증에 혹시나 예식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빨리 가야 되는 모양이다. 하객들은 김 선생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과 교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술잔을 돌리는 일도 없었고, 뽕짝 같은 유행가도 틀지 않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한 분위기였다. 나도 모처럼 차창 밖에 펼쳐진 겨울 풍경을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신랑은 일류대학을 졸업하였으나,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도서관이나 주로 컴퓨터에 몰입하면서 방황하였다고 한다. 외아들이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결혼은 물론이고 확실한 직업도 없었으니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선생 내외는 자식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도하며 참고 기다려주었다. 결국 아들은 늦게나마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덤으로 예쁜 신부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긴 방황의 끝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식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준 보상을 한꺼번에 두 개나 받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몇 시간을 달려 혼례식장에 도착했다. 예식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다. 목사님의 주례사는 성경 말씀과 인생 경험담에 덕담까지 곁들여 말씀 내내 심금에 와 닿았다.
유행가 <만남>이라는 노래 가사 중에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였어…’라는 한 소절을 흥얼거리며 이 부부의 만남은 30년이 넘도록 서로 만나지 못한 바람을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부부는 두 개의 손과 같아서 오른손이 가려우면 왼손이 긁어주고 왼손에 때가 끼이면 오른손이 닦아주는 것과 같으니 서로를 위해 노력해라, 그리고 사랑은 샘물 같아서 퍼내어도 줄지 않는 것이니 사랑하는데 인색하지 말라는 말씀과 부부가 살아가면서 싸울 수도 미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을 사랑과 화해로 빨리 풀어야 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풀지 못한 미운 마음이 병이 되어 가정이 파탄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며 하루해를 넘기지 말라고 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사회를 맡은 젊은 분이 마이크를 돌려가며 자기 소개와 결혼 축하에 대한 멘트를 하는데 나의 차례가 되어 일어섰다.
“저는 고현에 사는 반○○입니다. 신랑의 어머니 김 선생님과는 문학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존경하는 목사님 그리고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의 가정은 불교를 믿지만, 아버지 형제 중 중부仲父님의 가족들은 기독교인입니다. 사촌형은 목사님으로 계시다가 퇴직을 하셨고, 조카는 서울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습니다….”
불현듯 내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내 고향 거림 마을에는 오래 전에 세워진 조그만 교회가 있었다. 교회를 담임하는 장로님은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수족을 못 쓰시는데도 참 부지런한 분이셨다.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면 목소리가 저렁저렁 교회 안이 울릴 정도로 크셨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교회 종을 쳤다.
나는 성경구절을 외우면 상으로 학용품과 가루우유를 주는 재미에 동네 친구들과 열심히 다녔다. 어느 해인가 성탄절에는 연극을 하였는데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 가는 동방박사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비단을 짊어지고 가는 배역을 맡기도 했다. 지금도 어쩌다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 장로님께 치시는 것 같아 지난날 생각이 난다.
언젠가 아내에게 우리도 교회에 나가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어 본적이 있다.
“부모님 때부터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들여왔는데 바꾸면 되겠느냐”는 아내의 대답 이후로는 개종改宗에 대하여 의논을 해본 일이 없다. 내세來世에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에 너무 바쁘게 살아온 탓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집에 온 즉시 주례사를 들으며 메모했던 〈부부십계명〉을 워드로 쳐서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새로운 각오로 여생을 살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아들딸에게도 메일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