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들은 감동스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날 산모가 미처 집에 다다르기도 전에 산통이 왔다.
다급해진 산모는 다리 밑으로 가서 아기를 낳았다. 다음날 그곳을 지나가던 선교사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내려가 보니 산모는 자신의 옷을 다 벗어 아기를 겹겹이 덮어둔 채 이미 얼어 죽은 후였다.
후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는 어머니 산소에 가서 옷을 벗어 무덤을 덮으며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오열하였다고 한다.
결혼한 이듬해 큰아들을 낳고, 삼년 후 둘째를, 또 삼년 후 막둥이를 낳았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아이들에게 군림하는 엄마였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너희들 키웠다고, 이미 성인이 다 된 아들에게 아직도 잔소리하며 살고 있다.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요즘은 집에서 공익 근무를 하고 있다. 이제 두 달만 더 있으면 다시 서울로 떠난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다보니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다.
일찍 자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잔소리를 매일 반복하고 아들은 그만하라고 한다. ‘할 만큼 하면 다른 공부도 하고 잠도 잘 테니 걱정 말고 먼저 주무세요’라고 한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복학한 후 매일 게임만 하겠지. 아침에는 늦잠 자다보면, 학교도 제대로 안 갈 거야, 그렇게 되면 성적은 형편없을 것이고 졸업을 해 봤자 취업도 잘 안 될 텐데, 서울 가기 전에 내가 저 버릇을 꼭 고쳐줘야 하는데’하며 다가올 일까지 떠올리며 혼자서 걱정을 하고 있다.
나는 자식들이 잘못했을 때마다 일일이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이 능사인 줄 알았다. 좀 부족하고 틀렸어도 여유를 갖고 바라보며 자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당장 고치라고 잔소리 만 해대었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지도 못했고, 손을 잡으며 칭찬해 주지도 못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어버이 날 저녁이었다. 늦은 밤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은 등 뒤에 숨겨온 카네이션을 수줍게 내민다. 밤늦게까지 싸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상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꽃을 받았다.
입으로는 ‘고맙다’라고 했지만 속에서는 딴소리가 흘러나온다.
‘엄마를 사랑하면 내 마음을 헤아려야지, 꽃이 뭔 소용이야. 그거 하나로 달랑 때울라고…’ 불러 앉혀놓고 좀 따져볼까 라고 생각하다가 잠을 잤다.
아침에 아들이 출근한 후 난 마루를 닦다 말고 카네이션 꽃을 바라보았다. 붉은 카네이션이 고운 천에 싸여서 아들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을 왜 모르시냐고’ 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닦달을 하고 야단을 쳐도 나를 믿는 아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아들을 믿는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한번 뒤돌아보자. 남의 애들처럼 호강스럽게 잘 키우지도 못했는데도, 어버이날 선물을 보내는 는 그 예쁜 마음을 왜 나는 헤아리지 못했을까. 순간 나는 감사한 마음에서 잔잔한 감동이 우러난다.
항상 똑똑한 척하면서도 나는 어버이 날인데도 아직까지 친정 엄마에게 전화도 드리지 못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으며 평생을 싸우며 사랑하고 산다고 한다.
이 끈질긴 인연은 수많은 세월 속에서 어떤 아픔이나 고통으로도 결코 떼어 놓지 못하며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오갈 데 없이 버려진 불쌍한 노인들 이야기가 나온다. 비록 자신은 버림받았지만 부모는 자식이 처벌이라도 받을까봐 결코 그 자식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게 부모의 마음인가보다.
젊은 시절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뭔가 고상하고 높은 이상이 담긴 꿈들은 결혼한 후 아이들을 키우는 모성이 생기면서 하나씩 씻겨 나갔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대명사요, 시작도 끝도 없는 지고지순한 이름, 어머니란 세 글자가 나의 전부라고 생각을 하니,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불현듯이 생긴다.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꿈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아이가 돌아오면 엄마가 미안했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고 안아주어야겠다.
갑자기 살가워진 내 모습, 왠지 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