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사랑
능소화 사랑
  • 거제신문
  • 승인 200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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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만발한 담장 앞에 선다. 가시를 달고 있어 함부로 자기를 못 만지게 하는 장미에 비해 능소화는 가시 대신 독毒으로 자기 몸을 방어한다. 함부로 자기를 만지지 말고 눈으로 보는 것만 허용한 꽃이다.

상민이 심었다가는 곤장을 맞았다니 양반집에만 심어 지길 일찍이 고집한 능소화의 기품이 대단하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경우는 드물다.

힘들어도 구차해 지지 않는 능소화의 기품이 부럽다. 시들기 전에 꽃잎을 떨구는 우아함도 지녔다. 꽃이 질 때도 그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활짝 핀 그대로 톡톡 떨어지는 품위가 있다.

자기 몸 어느 한 부분을 꺾어 담장 아래 꽂아주면 해가 바뀌어 꽃을 허용하는 관용도 베푼다. 아름다움과는 달리 품고 있는 독을 이해하기 쉽지 않아 구중궁궐의 꽃으로도 칭하는 능소화의 슬픈 전설을 떠올린다.

옛날에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 예쁜 자태가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았다. 궁궐에 처소를 마련해 주긴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으로 임금을 불러들여 봤겠지만 그녀는 그런 성품이 못 되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까지 기거하게 된다.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행여 임금이 자기 처소 가까이 왔는데 놓칠세라 담장을 넘겨보다가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장례도 거창했겠지만 잊힌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채 담 밑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한 그녀의 유언을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다.

빈이 살던 처소 담장 아래에도 더운 여름은 왔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행여 오실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펴고 덩굴로 자라는 어여쁜 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넓게 담장을 휘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잎의 모습이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하다.

한이 맺힌 탓일까. 아니면 한 명의 지아비 외에는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꽃모습에 반해 꽃에는 충이 있다. 생각 없이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그 충이 눈에 들어가 실명을 한다니 조심해야 한다. 능소화는 이별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며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를 갖춘 꽃이다.

자신의 몸에 꽃을 피워준 인연의 가지에서 시들 때까지 미련을 갖지 않는 꽃이다. 곱게 피었다가 작별의 시간을 앞당겨 스스로 땅으로 낙화하여 땅 위에서 시드는 꽃이다. 세상의 많은 꽃들이 가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그 가지에 매달려 시들 때까지 미련을 부여잡는다.

그러나 능소화는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자신의 가지를 떠난다. 세상이 자신의 아름다웠던 모습만을 기억하길 바라며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사람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별이라는 것을 여름 꽃 능소화에게 배우고 싶다. 비어 있는 골목길을 아득히 바라보다 진 꽃을 떠올리며 기다림과 집착은 다른 것이란 걸 안다.

기다린다고 해서 꼭 온다는 보장이 없지만 오지 않는 것일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자세여야 하나보다. 언제였던가. 어느 이름 없는 절간에서 어떤 중년의 공양주 보살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잃어버린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며 부평초처럼 살아온 지난 세월을 전설처럼 들은 적 있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가슴까지 더 강한 힘으로 박차고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 얼굴에 스치는 한스러움을 보며 나는 낮은 음성으로 능소화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어느 누구도 그리움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언어로 풀이하며 여인의 지조로 볼 때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다. 질긴 인연의 끈이라 할지라도 뚝 잘라 놓고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을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오래도록 스스로를 구속시켰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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