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는 사람도 적었지만 취직할 자리도 쉽지 않았다. 마침 동급생 중 K라는 분이 모 대학에 전임교수로 가기로 되었지만 본인은 외국을 가야 할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며, 우리 동기 중 한 사람을 추천한다고 하였으니 뜻이 있으면 먼저 그 대학의 교수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같이 졸업하는 4명 중 한 분은 전문대학에 근무를 하였고 남은 3명 중 다른 P라는 분은 야간고등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실제로 아직 직장이 없기는 내가 해당되어 3명이 모여 합의한 결과 내가 가기로 하였다.
당시의 대학 인사문제는 요즘같이 요란하게 신문에 공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선후배, 지인 등 인맥으로 주로 채용하였거나 대학에 직접 의뢰하여 대학에서 추천되면 해당 대학의 인사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만나 뵈어야 할 교수님은 아는 분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이야기가 된 K인 본인이 나에 대하여 소개도 해주고 교수님께도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서울 갈 준비를 하다 보니 계획한 날짜보다는 3일 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교수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는 아무개입니다. 저는 교수님을 기억하는데 교수님께서는 기억을 하실는지요?” 하고 인사를 드리니 무슨 일로 왔느냐고 반문하였다.
금번 같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된 K라는 분의 소개로 교수님을 찾아뵙게 되었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자네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고 P라는 군이 2일 전에 찾아와 사정 이야기를 하여 추천서를 대학에 보냈다고 하였다.
요즈음 같이 휴대폰이나 메일이 있었더라면 즉시 확인이라도 했을 텐데나는 3명이 합의를 하였고 K란 분이 나에 대한 이야기와 소개를 한다는 그 말만 믿고 서울까지 희망을 걸고 왔는데자네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고 하니 감쪽같이 속은 것 같고 눈앞이 캄캄하고 전신에 힘이 빠져 나갔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나도 추천을 하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해 보고 싶었지만 인人 부족 세勢 부족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초라한 모습으로만 생각되었다.
힘없이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혼자 여러 가지를 생각하였다. 다음날 대학 학과로 돌아오니 내용은 이미 다 알려져 있었고 어리석게 행동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학과의 모 교수님은 “니들은 싹씨(이)노란 놈들이다.”라고 꾸짖기도 하고 당시 석사과정 지도 교수님도 “너희들끼리 무슨 짓이냐”고 꾸짖기만 하였다.
그 당시 학과 교수님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K의 말만 믿고 지도교수와 의논도 또한 사실 이야기도 안 했다는 것이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었고 문제가 되었다.
그 후 새로운 각오로 노력하기로 결심하였다. “싹이 노란 놈”이 그대로 시들어 죽을 것이 아니고 더욱 용기를 가지고 이 “노란 싹이” 활기차게 자라서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 보람된 열매를 맺어 가야 되겠다는 각오로 생활하기로 하였다.
내가 갈 길은 학문 연구밖에 없다는 생각에 여러 곳을 도전했으나 내가 원하는 곳은 모두 실패였다. 답답한 심정에 철학관을 찾아가 미래를 물어 보기도 하였다.
당신은 초반은 하는 일마다 실패이고 중년을 넘어서면 서서히 좋아져 말년에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였다. 결과야 어떠하든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싹이 노란 놈이” 파랗게 돋아나서 푸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주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꼈다.
원하는 길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기로 결심하고 하루의 잠자는 시간도 줄여 가면서 노력하기도 하였다. 외국 유학을 마친 후 대학에서 학생들 지도나 강의를 하면서도 자라는 후진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던져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였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일수록 희망을 심어주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록 희망적인 말을 던져주었고 평생으로 더욱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어 노란 싹들이 푸르고 알찬 결실을 맺는 것을 영원히 보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