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바람에 흐트러지는 스산한 어느 가을날, 나의 거실에는 <G선상의 아리아>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다. 애잔한 느낌을 주는 맑고 부드러운 음악이 어느덧 옛날로 나를 데려다 준다.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친구 명순이는 해군 장교와 결혼해서 천사 같은 딸까지 얻어 신혼의 꿀맛에 빠져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근무시간이 끝날 무렵 친구 남편이 은행 뒷문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의 심부름을 왔노라면서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친구는 반가워 반색을 하며 맞아준다. 남편의 친구라며 해군 장교 한 분이 와 있었다. 인사가 끝난 후 우리는 트럼프놀이를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그 청년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고 만난 곳이 영도다리다.
서로 부끄러워 말없이 다리 위를 거닐었다. 한참을 거닐다가 다리 밑 바닷가로 내려갔다. 바위를 건널 때 그 사람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때의 부드럽던 감촉이 지금 되새김되어 전해온다. 우리는 큰 바위에 자리를 잡고 말없이 앉았다. 그의 입에서 무겁게 어떤 의미의 말이 나왔다. 청혼이었다.
나는 그때 어려운 집안을 지탱해 가는 소녀가장이었기에 결혼할 처지가 못 되어 청을 받을 수가 없었다. 훤칠한 키에 하얀 얼굴을 한 그는 더 창백해지면서 실망을 노래로 표현했다.
바다를 향해 멋진 테너 목소리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이 슬퍼 보여 미안한 생각으로 가슴이 아팠다.헤어지기 아쉬워 우리는 영도도리 밑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들어서니 손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그는 지금 이 곡이 <G선상의 아리아>라고 했다.
바흐의 명곡을 1871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빌 헬미’가 피아노 반주로 바이올린의 제4현의 G선에서 연주하도록 편곡한 서정이 넘치는 곡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라고 하면서 위안을 얻었는지 음악에 심취되어 갔다. 나도 마음이 놓여 커피잔을 비웠다. 그날 우리는 하얀 눈처럼 하얀 마음으로 헤어졌다.
세월은 어느덧 훌쩍 반세기를 넘겨 버렸다. 옛 시청 자리에 롯데가 동양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107층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
나의 로맨스를 담은 영도다리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추억의 멜로디는 영원히 나의 가슴속 강물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