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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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신문
  • 승인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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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거제수필문학회 회원

모 프로 농구팀 단장을 맡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영 쪽으로 선수들과 임원진이 연수차 온단다.

상위 팀들은 플레이오프 진출 준비에 여념이 없겠지만 하위의 성적으로 일찌감치 시즌을 끝냈나보다. 근처에 온 김에 같이 저녁 한 끼 하자 한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밤에 통영까지 차를 몰고 나가는 것도 마땅찮아 할텐데 하물며 남자 친구라니. 그렇다고 남편과 상의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선뜻 그러자고 했다. 남편에게는 부산에 사는 여고 동창생 이름을 둘러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구단의 책임을 맡아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나 보다. 머리숱이 성성해지고 위장병까지 얻어 나오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잠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마법에 걸린 듯, 밀린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 나왔다. 가족 이야기부터, 친구들 근황,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 등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와 비슷한 시각을 가졌기에 많은 부분에 동감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려는데 경기 관람 오는 팬들에게 주는 거라며 가지가지 선물들을 한 보따리 챙겨준다. 남편에게 둘러대고 온 속마음도 모르고 거절하는 데도 굳이 차 속에 넣어준다.

농구단의 로고가 새겨진 선물 보따리를 들고 들어서는 나를 보는 남편의 시선이 곱지 않다. 상대가 남자 친구라서 스스로 감추려 하고 경계를 짓고 있지 않았던가?

남자 친구들 사귀기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선배 언니의 소개로 인문학을 주제로 토론을 주로 하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쑥스럽고 어색했던 분위기는 1박 2일 일정으로 우리 기수끼리 단합대회 갔다 오라고 등떠미는 선배들에 의해 수월하게 무너졌다. 열 명이 넘는 무리들이 부산역에서 경전선 열차를 타고 하동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통금이 있던 때라 팔뚝에 찍어주는 야간통행 스탬프를 훈장인 양 치켜들고 조용히 잠든 시골 마을을 개선장군처럼 누볐다.

흙먼지 속에서도 쌍계사로 향하는 계곡의 벚꽃들은 우리를 축복해 주는 듯했고, 섬진강 모래밭에서 우러러본 밤하늘의 별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만 빛나는 듯했다. 밤새 노래하고 지치면 이야기했다.

세상에 대해 무지했지만 지적 오만함과 오기로 충만했던 때라 어설픈 논리로 상대를 설득시키고 설득당하면서 밤이 새는 줄 몰랐다.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때의 풋풋함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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