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미화
첫사랑의 미화
  • 거제신문
  • 승인 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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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옥/거제수필문학 회원

얼마 전 딸의 검진 때문에 부산에 들렀다 오는 길에 여고 시절 친구를 만났다. 첫사랑이었다. 옛날 연애시절과 같이 애절하거나 부끄러운 감정 대신,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추억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별에 관계 없이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유쾌해진 마음으로 딸과 함께 그 친구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대도시의 번화가가 아닌 터라 길이 단순하겠거니, 하고 쉽게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표지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차는 방향을 잃고 휘청휘청 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표지판을 아무리 정확하게 읽고 길을 가려 해도 복병은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공사판들. 연말이라 그런지 길을 아예 들어내고 있었다. 결국 알지도 못하는 길로 돌아서 어찌어찌 가야 했다. 처음에는 그 길이 난감했지만 파란 바다와 맑은 하늘이 훤히 펼쳐졌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길은, 어쩌면 내 남편을 만날 길이었을까.

친구를 만나 식당에 들어갔다. 친구는 딸에게 ‘초등학교 시절 해운대에서 보고는 처음 보는 것 같다’라며 ‘많이 컸네’라고 했다. 딸은 오래된 기억이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예전 레스토랑에서 만난 사람이 눈앞의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지 대꾸 않고 살짝 웃었다. 한참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문득 말했다.

“저 아저씨가 엄마가 말한 그 첫사랑이야?”
“응. 이제 알았나?”

내 대답에 딸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 아저씨인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딸은 덧붙였다.

“나는 엄마 말만 듣고 엄청 잘생기고 눈에 띄는 사람인 줄 알았지. 딱 봐도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
“어? 니 눈에는 그렇게 안 보여? 그럼 어떻게 보이던데?”

“그냥 평범하던데. 딱 묻히기 좋다고 해야 하나. 하긴 우리 아빠도 그렇긴 한데, 좀 다른 의미로. 아저씨의 눈에서 막 초롱초롱 하거나 꿈에 대한 열정 같은 것도 없어보이고 아, 아니면 내가 어른이 안 되어봤으니까 표정 같은 건 모를 수도 있다. 어른들은 표정 잘 숨기니까. 하여튼 많은 직장인 중 한 명으로 보이더라. 아빠는 그냥 묻히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실제로 묻히기도 하고.”

내 ‘첫 사랑’은 이토록 미화되어 있었던가. 사실 나는 그 친구의 얼굴도 돌아서면 가물가물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긴 손가락을 지녔다거나 시험기간마다 내 공부를 도와줬다거나 하는 등의 지극히 단편적인 장면들. 예전 너무 쑥스러운 탓인지 눈, 코, 입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감정들은 소중하고 깊은 추억을 간직해서 더 좋게 기억되는 게 아닐까. 딸은 내가 감성적으로만 빠져드는 것을 막았다. 오히려 예리하게 꼬집었다.

“원래 ‘이 사람이 착하니까 아마 이랬었나?’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그게 ‘이랬던 것 같아’가 되고 ‘이랬었지’가 되는 거 아니가? 저 삼촌에게 엄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로 미화된 거겠지. 그게 당연하기도 하지만.”

나는 딸의 말에 수긍했다. 딸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어릴 적 했던 생각을 딸도 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상황도 추억으로 남겨지거나, 잊혀질테고, 그도 아니면 미화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까? 요즘 나와 함께 딸이 문학 심리치료 수업을 들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순간은 지나면 곧 추억이 될테니 잊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

나는 딸의 얼굴이 빠알간 노을에 젖어 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옛일들이 태워져 타오르는 걸까. 잊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밝은 빛의 해도 결국 마지막의 황혼은 아름답다.

추억이 마치 처음과 다르듯이. 지나가는 것은 모두가 애틋하고, 눈을 잡아 뗄 수 없게 아름다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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