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보리밭
  • 거제신문
  • 승인 200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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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길 거제수필문학회 회원

보리는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내는 몇 안 되는 식물 중 하나다.

우리민족 모두가 배고픈 시절, 보리가 채 익기도 전에 이삭을 끊어 죽을 쑤어먹던 보릿고개. 그 고개를 넘기가 너무도 어려운 때가 있었다. 보리는 이러한 애환이 담겨있는 우리민족의 매우 중요한 먹거리였다.

당시 우리 집 최대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었고, 홀어머니를 비롯한 다섯 명의 형제들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형은 가족들을 위해 급기야 멸치잡이 권현망 배 선급금을 쓰게 되었다. 선급금은 여섯식구의 생활비로 다 써버렸고, 잠시 객지에 나간 형은 낙망하는 날이 다 되어가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선급금을 갚을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의 한숨을 보다 못한 내가, 할 수 없이 형 대신 배를 타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배 타러 떠나는 날 시렁위 사각 가방에는 형이 입고 갈려고 준비한 작업복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내 나이 만 열아홉, 배라고는 난생처음으로 권현망 선원으로 승선하게 되었다.

형님은 나보다 키가 더 컸었기 때문에 바지는 걷어 올려야 했고 소매도 접어서 입어야 했다. 출항 하는 날 양쪽 배 선원을 갈라 배치하면서 형의 이름을 불렀고 내가 “예”하고 형대신 대답을 했다.

누군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고 대신 온 나를 못마땅해 하는 사무장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멸치배 선원생활은 시작되었다. 두 척의 배가 선수를 나란히 하고 오색찬란한 선왕기를 휘날리며 제승당 어장막을 한 바퀴 돈 후 우리들은 먼 바다로 나갔다.

첫 그물이 바다에 투망되는 순간 신기한 마음도 잠시, 나는 배멀미에 얼굴은 노래졌고 토하기까지 했다. 힘든 하루 작업을 마치고 희미한 불빛 따라 항구로 들어오면서 바라본 달은 남의 속도 모르고 구름 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 당시 배 생활은 자체적으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는데, 당번을 정해 하루 작업을 마치고 어두운 밤에 물을 길어려 가야했다. 언젠가 사랑도 어느 마을에 물을 길어려 갔는데, 섬에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수틀린 동네 청년들로 부터 두레박을 빼앗기고 물통이 박살이 나기도 했었다.

사정사정하여 물을 길어 손전등 하 나 없는 깜깜한 밤에 막대기 양쪽에 물통을 달고 목도를 하듯이 매고 온 날이면, 목이 아파 나는 밤새 끙끙 앓았다. 서툴고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이 고달픈 배 생활을 제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울면서 빌 때도, 역시 무심한 달은 구름 속을 헤집고만 다녔다.

어렵게 다니던 고등학교 마져 형편상 자퇴를 하고 나는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에게 뱃머리로 가서 짐을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리어카를 끌고 가보니, 하필 통영으로 같이 학교에 다니던 또래 친구들이 객선에서 내렸다. 선창가에서 리어카를 잡고 엉거주춤 서있는 내 곁을 여학생들의 하얀 교복칼라가 스쳐지나갔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남자 애들은 ‘어, 현길이 아니냐’ 하며 안됐다는 눈치였다. 그때의 내 모습이 추운겨울을 견디며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보리 같은 신세였고, 마치 그들은 보리밭 근처에서 신바람이 나서 바람개비를 돌리며 뛰노는 아이들 같았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배타기는 일 년 정도 뒤에 형 대신 가게 되었던 것이다.

세월은 내가슴에 학업중단과 멸치 배 선원이라는 큰 그림자를 그려 놓은 채 흘러갔다. 언젠가 형제들이 다 모인 명절 날, 그때 가족을 위해 형 대신 선급금 팔만오천원에 노예처럼 팔려간 이야기를 우연히 하게 되었고, 내 생각과는 달리 서운하게도 형제들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대부분이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겨울 보리밭처럼 내가슴을 더욱 시리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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