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C496년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월(越)나라로 쳐들어 갔다가 월왕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본국으로 돌아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를 갈고 기회를 기다려 왔던 부차는 드디어 월왕 구천을 무찌르고야 말았는데, 이리하여 생긴 말이 와신(臥薪)이며, 이 부차에게 진 왈왕 구천이 다시 이를 갈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았는데 그는 곰의 쓸개를 매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빨며 패전의 분을 이기고 다시 올 기회를 엿보았다 하여 상담(嘗膽)이라하는데, 이 둘을 합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힘들고 어려워도 입술을 깨물면서 참는 것을 가리켜 와신상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본인의 인고의 노력을 빗대어 하는 말로서의 와신상담은 좋은 말이지만 원수를 갚기 위하여 하는 와신상담은 그리 아름다운 말은 되지를 못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온갖 차별과 설움을 다 당하다가 결국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 가 버린 사람, 요셉 말입니다. 그가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리기 직전 그는 팔지만 말아달라고 발버둥을 치면서 애원을 했건만 억센 10명의 형들은 그를 무자비하게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오나라의 부차나 월나라의 구천이었다면 억울해서 하룻밤도 두 눈을 감고 잘 수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화병이 나서 죽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먼저, 그는 초월했던 사람입니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설움과 울분이 없었겠습니까만 그는 그것을 참았고 잊었고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후에는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복수의 칼을 간다고 와신상담하지 않았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억울함을 참고 내색하지 않았던 초월의 사람 요셉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초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보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는 외국 사람이면서 노예였습니다. 거기다가 나이도 어렸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금 같으면 대통령 경호실장댁 가정 총가 되었으니 이것이 우연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의 대단한 노력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노예가 이 정도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성실한 젊은이였던 것입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억울하고 힘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복수의 칼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원수가 주릴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때 그를 그토록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팔아먹었던 형들이 이제는 동생되는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게 됐고 그는 당대의 최강국의 총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됐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요셉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초월과 성실과 믿음이 없이는 아니 그 초월과 성실과 믿음이 요셉을 능가하지 못하면서 그 영광만 바란다면 옳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바라기는 도리어 요셉을 초월하시기 바랍니다. 그 보다 더 과거를 잊고 그 보다 현실에 충실하고 그보다 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요셉에게 주어졌던 그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의 은혜가 덧입혀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