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랑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으로서 여러 양상을 가지고 있다. 나를 태어나게 한 사랑 혈연관계, 같은 배움터를 나왔다는 학연, 지연 등의 온갖 관계와 사회라는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사랑과 존경은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불가분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남녀간의 결혼도 본인들의 사랑과 개성과 환경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나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절반의 부족함은 사랑으로 채워가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같이 정이 메마른 세상에 ‘사랑이 밥 먹여 주냐’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사랑의 부족하여 일어나는 불미스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찰서장 재임 때 동료들과 함께 퇴근길에 옥포 중앙시장 골목 할매식당에서 반주로 술잔을 받을 때마다 ‘반잔은 사랑으로 채워 달라’는 화두로 동료들과 상하관계를 떠나 서로 정을 나누며 단골로 써먹던 시가 한편 있다.
‘비워 있는 반잔에 사랑을 채우자/ 사랑이 우정이라면 우정을 채우고/ 사랑이 설움이라면 그 설움을/ 사랑이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을/ 사랑이 용서와 겸손이라면 그것을/ 생명 있는 모두의 잔에 영원한 사랑을!’
요즘 대학에서 특강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신화의 나라 대한민국,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사랑에는 네 이랑(단계)이 있다고 내 나름대로 사랑의 정의를 늘어놓는다.
첫째 이랑은 삼 수水 변에 쓰는 랑(浪 : 물 절절 흐를 랑)자다. 고요한 가슴에 마음이 일기 시작하여 물이 졸졸 흐르는 단계를 지나 출렁이는 단계로 나아가고 다시 물이 절절 흐르는 단계로 진입한다며 여기까지가 사랑의 제1단계 ‘일랑’이라 했다.
둘째 이랑은 불 화火 변에 쓰는 랑( : 불 이글이글 타오를 랑)자를 써서 사랑의 불이 붙으니 목마른 단계를 지나 목이 타는 단계로 진입한다고 했다. 머리를 빡빡 깎아놔도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가고 골방에 가둬나도 어떻게든 뛰쳐나가는 물불 안 가리는 단계가 이쯤 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단계를 제2단계로 ‘이랑’이라 했다.
셋째 이랑에서는 뼈 골骨 변에 쓰는 랑(骨良 : 무릎 뼈 랑)자를 쓴다. 사랑불이 붙으면 뼈만 남게 되는데 타버린 흔적은 남은 뼈로서 가늠한다. 스님들의 몸이 타고 남은 사리로 그 삶을 평가하듯이. 아울러 이 단계는 사랑이 뼈에 사무치는 단계다. 이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연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지를 ‘삼랑’이라 했다.
마지막 넷째 이랑을 ‘사랑’이라 부르는데 죽을 사死자와 사내 랑郞자를 함께 쓴다. 진정한 사랑이란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사랑은 깊이와 넓이를 만든다고 한다. 학생들의 반응은 재미있다고들 한다.
사랑에는 이글거리는 불꽃 속을 뛰어들어 자식을 구하는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왜구에게 짓밟힌 조국을 구하기 위해 열두 척의 배로 적과 싸워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불멸의 이순신 장군,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신 죄로 인해 십자가 형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던져버린 책임 있는 그 사랑 앞에서 나는 항상 사랑의 참뜻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며, 이해하고 배려하며, 상대의 허물을 감싸주며 죽음도 불사한다는 사도 바울 선생이 남긴 글에서 참사랑의 깊이를 되새겨 보면서(고린도전서 13장 : 사랑) 나는 성경에서 내리는 사랑의 정의를 좋아한다.
이렇듯 영혼으로 채우는 나의 사랑 이야기는 내 인생의 테마다.
황혼 빛이 융단처럼 깔린 이 가을 들길을 걸으면 나의 눈앞에 지금도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이 무지개로 떠오른다. 오직 자식 잘 되라고 기도하며 모진 고생 참아 오신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으로 내 어깨 만져 주시던 그 모습이 올올이 가슴을 풀어낼 때면 나는 말없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못 다한 나의 꿈을 그려본다.
아 하늘이시여! 이 은총의 잔이 목마른 내 영혼을 적시는 영원한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노래합니다. 내 삶의 앞길에 “반잔은 사랑으로 채워 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