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善竹橋)
선죽교(善竹橋)
  • 거제신문
  • 승인 200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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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야심을 위해 군사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의 고민은 당시 민심의 주체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따라주지 않는데 있었다.

처음에는 이성계와 함께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등 뜻이 같았지만 그렇다고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까지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몽주는 혁명파의 제거 기회를 엿보기 위해 문병을 빌미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를 눈치 채고 있었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별도로 불러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시를 한 수 읊는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듣고 그 자리에서 정몽주도 답시를 읊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는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참고로 북한의 젊은이는 「일백 번 고쳐죽어」를 「골 열 번 고쳐죽어」로 외우고 있었다. 이 때 골은 곱의 옛말로 열의 곱이니까 곧 백을 일컫는다.)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이방원은 문객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선죽교에서 철퇴로 암살하게 된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작은 하천의 돌다리에 불과하지만 다리 옆에 「善竹橋」라고 쓴 한석봉의 글씨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지만 정몽주가 죽은 후 참대가 자랐다 하여 선죽교로 바뀌었고, 북한 안내아가씨의 말로 아직도 정몽주의 피가 다리 위에 비친다고 하기에 자세히 보니 얼룩이 있긴 하지만 그걸 피라고 우기는 건 무리다.

정몽주의 후손들이 조상의 피를 밟고 지나면 안 된다고 정조4년(1780년)에 선죽교 둘레를 돌난간으로 막고 바로 곁에 별도의 돌다리를 만들어 거기로 통행하게 만들어 놓았다.(san10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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