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지나면 10월, 아버지께서 우리들과 정녕 헤어진 달입니다. 오늘처럼 흐린 가을 하늘을 바라다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유난하면서도 왜 내가 아버님 살아계실 때 시원하게 여쭤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곤 합니다. 이런 후회는 생전에 제가 아버지에게 보다 가까이 가지 못했던 저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
그리 어렵게 공부하셨음에도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셨고, 또 훌륭한 집안에 결혼하여 앞길이 창창하셨는데, 왜 어려운 길을 택하셨습니까.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니면서 소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였으나, 4년제라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중학교에 가지 못함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다행히 할아버지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이웃 일본인 소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이 자식을 살려 주이소. 정말로 돈이 없어서 소학교를 2년 더 유학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때는 자기 형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보낼 수 있답니다. 제발 집에서 밥 먹고 다닐 수 있는 이 학교에 편입시켜 주이소.” 하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큰아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 덕택에 아버지께서는 2년 더 인근의 일본인 소학교에 다녀 졸업을 하고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셨지요. 그리고 졸업생 대부분이 조합으로 취직하는데 반하여 아버지께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경영하는 식산은행 서울 본점에 발령받고 근무하시다가 고향인 통영군(거제가 통영군에 속해 있었음)에 있는 통영 식산은행에 근무하게 되었다지요.
당시, 대만을 오가면서 무역을 하시던 외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부잣집 사위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처갓집 물건을 우마차에 싣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외삼촌들에게 들켜 맞기도 하고, 추궁당하기를 여러 번 했다죠. 결국 경찰서에 잡혀 갔다는 이야기를 외숙모님으로 부터 들었습니다.
일본인이 다 물러가서 높은 자리가 보장되는 마당에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일상적인 생활에서 항상 벗어나시던 아버지 뒷바라지에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 아이를 낳고 겨우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병을 얻어 두 살 된 아들을 남겨 두고 돌아가셨어요.
이듬해 재혼을 하여 자식을 다섯 명이나 두었습니다. 식모를 두 명이나 둘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하던 그때 말입니다.
온 식구가 식사할 때, 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가 낳으신 내 바로 밑 동생하고 겸상을 하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계란과 김을 먹게 하고 저는 식모와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식사 때마다 엄마의 꾸중에 도망치듯이 밥을 먹었던 그때, 왜 아버지는 모르는 척하셨습니까. 어린 마음에도 불평등을 느껴 방구석에서 밤마다 눈물 흘리며 잠든 자식을 설마 모르시진 않으셨겠지요!
내가 직장을 얻고 철들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병환에 계셨기 때문에 ‘언젠가 병이 나으면 물어봐야지.’ 하다가 시간이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이 가을에 창가에 서서, 저물어져 가는 교정을 바라보며 아버지에 대한 못난 푸념으로 한동안 아버지의 상념에 빠졌었습니다.
제 나이도 아버지 생전의 연세를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대답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제야 아버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답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점은 못돼도 칠십 점 정도로요.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