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거제의 3대 독립운동가(신철, 양명, 윤일)의 한 사람으로 일본 큐슈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해 민족해방운동가로, 잡지사 주필로, 의사로, 또한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간암으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신용기 선생은 1900년, 하청면 하청리 571번지에서 출생, 일제때 면장을 지낸 신주병씨의 셋째 아들(첫째 용우, 둘째 용범, 넷째 용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9년 10월1일 거제보통공립학교(현 거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학적부마다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거제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고보에 입학, 학창시절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정학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경성제국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께 귀국했다.
곧바로 그는 조선사회운동의 중추였던 청년운동에 몸담아 북경·동경·소련 등지에서 수학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싹트게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내 민족해방운동가들은 활동 근거지를 국내서 해외로 옮겼다. 신용기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 체류하던 중 국제공산당 ‘이르츠크파’의 김하석, 한명서씨 등에 발탁돼 김찬씨 등과 함께 1923년 4월, 조선으로 파견돼 국내 공산청년조직 책임자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해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21년 무정부주의자들(중심인물 김약수, 김종범)을 중심으로 결성한 북성회와 무산자청년회를 병합하는 한편 1924년 2월13일, 신흥청년동맹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1924년 3월에는 사리원에서 ‘조선청년의 책임’을 강연했다.
특히 1924년 12월16일에는 신용기 선생 외 집행위원 12인이 ‘한일무산자계급의 연계를 더욱 유기적으로 강화하지 않고서는 조선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요지의 등사인쇄물을 제작, 동경, 대판 방면의 일본인 사상가들에게 발송했다.
신용기 선생은 여운형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전해졌으며 여운형은 신 선생에 대해 ‘당대의 철학가이자 명석한 두뇌를 지닌 혁명가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1927년 4월,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종로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검거돼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28년 11월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공판을 받았으며 출옥 후 소련으로 갔다가 1930년 초 귀국해 거제에서 의원을 개업했다.
그러나 의료자격정이 없어 불법의료행위 혐의로 거제경찰에 검거되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담당 형사는 신 선생의 비범한 자태에 감동, 경남도에 연락하며 도지사는 신 선생의 명성을 익히 알고 의원허가를 승낙했다.
그는 또 부산 광안리에 대방의원(大邦醫院)을 개업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진료라는 혜택과 인정을 베풀었다.
또 동지들 규합에도 몰두하며 문학에도 천부적인 기질을 발휘, 북한 산하를 ‘주유천하’ 하며 나라 잃은 슬픔을 시조로 엮었고, 백두산 천지연과 묘향산 등지를 돌면서 꺼지지 않는 우리의 민족혼을 20여편의 시조에 담아냈다. 그러나 그는 간암이라는 지병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 채 1948년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신 선생에게는 부인과 ‘태호’라는 아들(생존했을 경우 72세)이 있었으나 해방이 되던 해 아들은 사망하고 부인은 실종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하청면 하청리 571번지에 위치한 신용기 선생의 생가는 아직도 건재하며 이곳에는 신 선생의 장조카 신창호씨(74·신용우씨의 장남)가 기거하고 있다.
현재 신 선생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공동묘지에 있으며 머잖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