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제도는 고려에 이어 조선이 건국되자 왜구의 침공이 종식되면서 태종 14년에 경상도 백성 일부를 환도시켜 거창군과 합하여 제창현이라 불리다가 그 이듬해 다시 거제로 명칭을 바꿨다.
거제현으로 다시 바뀌면서 당시의 현아지였던 사등지역(지금 사등면)이 협소하고 방비적 어려움 등으로 40여년 간의 축성 끝에 고현에다 현아지를 옮겼다.
성종 및 중종 때는 본도가 지리적으로 해산 방어의 요충임을 인식하고 조라(지금의 구조라), 옥포, 가배, 영등, 장목, 지세포, 율포 등에 7진을 설치하고 산련포에 수군절도사의 수영을 두어 7진을 관리했다.
조선시대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점점 미묘해져 해상 방어의 중요성이 중시되면서 거제는 경상우도 김해 도호부에 속했다가 성종 12년에 현을 폐하고 한 때 거제부로 개편 문무를 통괄하게 했다.
선조 때 시작된 7년의 임란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이순신의 옥포 해전의 승리를 필두로 승세의 전기를 잡아가자 해방의 통수부로서 '통영'을 설치하고 삼도수군을 통제한 근거지를 마련하는 기초로 삼아 경상 우수영을 한산도(당시 한산도는 거제현에 속했음) 두억포에서 전라도 진도로 다시 이곳의 가배량(당시 일명 오아포)으로 옮겨 국방 중건의 중임을 거제가 맡게 됐다.
현종 때 현아를 고현으로 폐현된 명진현을 지금의 거제면에 옮겼다.
숙종 때는 부사 변진영이 거제가 남해방어의 요충지임을 들어 그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조정에 건의하여 현을 도호부로, 현령을 절도사로 개칭하고 각 진을 통할하여 거제면 죽림포(다숲개)에다 어해정을 건립 전선대장을 두고 전함의 상비와 해군양성에 주력했다.
고종 때에는 다시 거제를 부로 재 개칭하고 동왕 32년에는 전국적으로 단행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시 거제군으로 개칭 경상남도의 속군으로 군수를 두어 서정했다.
그 뒤 한일합방을 맞이하면서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한 관제 개편을 단행 1914년 3월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경상남도의 1부 30군을 2부 19군 257면으로 개편했는데, 이 때 거제군과 용남군을 병합하여 통영군이라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섬 중 두 번째로 큰 섬이면서도 유일하게 폐합되면서 당시 이에 반대하는 군민의 무마책으로 거제군 서부면을 거제면으로, 용남군 동면을 용남면으로, 용남면 서면을 통영면으로 군명을 면명으로 변경하여 주었음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이로서 거제도는 육지에 부치어 39년간 군(郡)없는 후진과 서러움을 당하여 왔는데 6.25동란시 낙동강 전선구축과 1.4후퇴로 피난민의 집단후송 수용구호 했고 UN군 포로수용소 설치에 따라 전쟁터를 방불케 한 추방기지로 1953년 1월 행정구역의 개편, 법률 제271호로 다시 통영군과 분리하여 복군됐다.
1995년 1월1일 법률 제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시(市) 설치에 따라 시로 승격한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거제시로 통합하여 시청을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두고 출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제라는 이름은 클 거(巨)와 건널 제(濟)로 큰 섬이라는 뜻이고 종래의 한산섬 등 100개 넘는 섬이니 많을 거(鉅)와 거제 계룡산하 구백만이라는 구전에 따른 구제할 제(濟)의 뜻으로 거제(巨濟)라 했다.
1970년대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이 잇따라 거제에 자리 잡으면서 거제는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난 2006년 인구 20만을 넘어섰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옥포대첩을 이루었고 6.25동란 때에는 피난민의 구호와 포로수용으로 100만명을 구제함으로써 입증되고 있는데다 조선산업의 발전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구하고 여름철이면 관광지로 전국에 많은 관광객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거제는 이름 그대로 구제와 은혜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