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우정도 사랑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믿지 못할 세상이 아닌가. 백년을 해로한다는 말은 옛말인 듯싶다. 결혼의 30퍼센트 정도가 이혼을 하는 셈이고 부부간에 간직했던 비밀이나 직장에서 취급했던 비밀스런 내용을 폭로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수가 있는가 하면, 친구관계를 악용하여 보증이나 사기를 치는 수가 더러 있다고 한다.
60년대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軍에 제대를 하고 오면 취직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 아니면 외항선 선원으로 가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운이 좋게 군청에 취직이 되었지만 친구 W군은 공직 시험에서 신장이 모자라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공무원 시험에서 학과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신체검사를 하는데 키가 1센티 모자라서 안타깝게도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마을 친구들이 모여앉아 꾀를 낸 것이 양말 속에 구두창을 넣고 키를 재면 될게 아닌가, 라고 결론을 얻어 준비를 해갔는데도 그날은 신검대에 올라설 때는 양말을 벗으라는 검사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었다.
그 다음 해 또 응시하여 1차 합격은 되었지만 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머리 밑에다 고약을 붙여보자.’ 경남 하동에서 제조하는 조고약이 종기나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던 때라 쉽게 구할 수가 있었고 몇 통을 사서 머리 밑에 두툼하게 붙이고 포마드 기름을 머리칼에 발라 뒤로넘기는 올백 고데를 하였다.
신체검사 결과 신장 166센티 보기 좋게 합격을 하였다. 담당자가 합격이라고 하는 순간 그는 정신없이 신체검사실 문을 빠져 나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위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에 해당될지 모른다. 만약 탄로가 났다면 합격이 취소되는 엄중한 범죄이다.
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교수 가짜 학위 사건은 명문대학교의 졸업장을 위조했고, 가짜 학위를 걸러내지 못한 대학교의 검증 시스템에도 많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연유로 전도가 촉망되던 고위공직자가 낙마하는 사건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 친구 누구도 고약사건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고 철저히 우정을 지켜왔다. 요새 같으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삭막한 세상에 그런 비밀이 지켜졌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W친구는 임용 후에 키가 조금 커서 신장은 경찰체격조건에 흠결사항은 없었다고 한다. 한창 성장기에 심한 노동과 영양이 모자라서 신체발육이 지연되었다가 늦게 키가 커지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가끔 그를 ‘고약 순경’이라고 놀려댔지만 그는 어렵게 임용된 직장이라 더욱 애착심을 가지고 경찰의 본분을 다하는데 열심히 하다가 당당히 경찰 간부로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오랜만에 객지에 나가 있는 우리 고향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강원도 관광길에 올랐다. 열 명이 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였는가 하면, 노자산 중턱에서 숯을 굽던 순수한 친구도 있다.
십리 길을 뛰어서 학교에 가던 일, 닭서리하다가 주인에게 혼난 일 등. 마음은 동심의 추억에 젖어 있지만, 세월은 온갖 사연을 간직한 채 흐르고 흘러 대부분 현직에서 물러난 백수白手들이다.
그날따라 가을비가 내렸다. 월정사 입구부터 오대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가에 가로수 은행잎이 비에 젖은 채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우리도 가을의 문턱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할 한 이파리의 나뭇잎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차창에 가을비는 흘러내린다.
우리는 저녁에 식당에서 소주잔을 높이 들고 한 친구가 선창을 했다.
“잘난 놈 못난 놈 이제는 필요 없다. 구구팔팔이삼사. 우리 친구들 죽는 날까지 우정은 영원히 변치 말자. 건배!” 하고 선창을 했다.
모두 “건배” 하고 따라 소리를 질렀다.
조용한 산골의 여관방에는 오랜만에 우정을 실타래처럼 풀어놓으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정담으로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