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죄(姦通罪)
간통죄(姦通罪)
  • 거제신문
  • 승인 200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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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헌강왕 때의 일이다.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處容)이 늦은 밤에 집에 들어와 보니 침상에 다리가 넷이었다. 처용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하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이에 역신(疫神)이 처용에게 당신 아내를 흠모하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앞으로 당신 형상만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설화가 보여주는 의미로 당시 신라사회는 간통이 묵인되거나 아니면 간통이 그저 대수롭지 않는 야합(野合)의 수준으로 완전히 금기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동생 차득공(車得公)이 여행중 무진주(武珍州:광주)에 이르러 안길이라는 현지 관리의 집에 유하게 된다. 안길은 손님이 예사분이 아님을 눈치 채고 세 명의 부인을 불러 누가 오늘 이 손님과 동침할 것인지 묻는다. 그 중 한 부인이 차득공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마치 에스키모 종족들 사이에 일부 남아 있는 손님 접대방법으로 아내를 하룻밤 빌려주는 풍습과 비슷하다.

조선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1423년 9월 전직 관찰사 이귀산(李貴山) 몰래 아내 유씨가 조서로와 상통하다가 발각된다. 이에 세종은 「조서로는 벌할 수 없지만 음탕한 짓을 저지른 유씨 부인은 삼 일간 저잣거리에 서게 한 뒤에 목을 베라」 명한다. 간통을 했지만 남자는 빠져나가고 여자만 처벌받게 된다.

간통을 속어로 「서방질」이라 한다. 서방질이란 용어로 보아 정조란 여자의 문제로 얽어 놓은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같이 몸을 섞어 놓고도 여자는 몸을 바치는 대상이고 남자는 몸을 차지하는 입장에 선다. 더구나 여자에게는 「몸을 더럽혔다」는 표현으로 비하된다. 이런 남성지배구조에서는 간통이란 성문법이 오히려 여자 쪽에 더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 1947년, 독일 1969년, 프랑스 1975년 등 대다수의 나라가 형법상의 간통죄를 폐지했는데 아직 대한민국만이 헌재의 네 번째 합헌 판정으로 살아남게 되었다.(san10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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