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가을꽃 한마당 축제에 세 번 다녀와서 ①
제3회 가을꽃 한마당 축제에 세 번 다녀와서 ①
  • 거제신문
  • 승인 2008.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호 / 자유기고가

FICTION 같은 NONFICTION

자칭 애향시민인 필자는 몇년 전부터가 아니라 1965년부터 여유롭고 짬 있는 날에는 걷거나 간혹은 버스를 타고 고향땅 거제를 두루 다녔다. 그때 그 시절만 해도 신작로 길가에는 버드나무 가로수가 햇살 맞는 길손의 쉬어가는 그늘막이 됐고, 해변 갯바위에 붙은 석화는 시장기를 덜어주는 자연식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길갓집 대문은 물론 열린 안방 문을 통해 농짝의 열려있는 붕어자물쇠까지 보면서 주인 없는 집의 부엌문을 열고 들어 도랑사구(부엌 질그릇의 일종) 뚜껑을 들고 바가지 물로 갈증을 달래던 때니, 요사이 신세대는 상상이 어려울지 모르겠다.

당시는 장승포읍내와 거제 서정리 면소재지가 인구 밀접지이고 그 외 지역에는 옹기종기 초가삼간 간간이 있는 곳에 하루 한두 번 다니는 버스정류장이 있을 뿐, 사람구경은 학교를 빼면 열흘에 두 번 서는 거제장, 하청장 등의 몇몇 장날 마당이 고작이며, 장승포와 인근 두모, 그리고 옥포와 하청, 성포의 여객선 뱃머리가 때가 되면 시끄러울 뿐 이었다.

그 시절의 거제는 6·25전쟁의 처참한 피난시절을 겪은 아픈 흔적을 곳곳에 남겨둔 채, 그래도 단아하고 수려하고 인심 좋아 정 냄새 물씬 거리는 내 땅, 내 마을, 내 고향 거제가 한 없이 좋았다. 그리고 격동의 거제. 조선산업의 시대가 열리면서 거제 땅의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소의 깡깡 망치소리 몇 배의 가슴 치는 소리들이 마을마다 울려났고, 어린 것의 가슴 멍이 시퍼렇게 내비치기 시작했다.

어째서냐고. 조선인력 모집에 끼여 팔도 망나니들이 모여 들어, 있는 그대로의 짓거리가 거제 땅을 어지럽혔고, 돈 맛에 솔깃해진 우직하고 순박한 이웃민심을 제멋대로 흔들었으며, 멀쩡한 가정도 더러는 파괴되고, 천혜의 자연은 훼손되기 시작했다. 또 한편의 슬픈 거제 역사가 펼쳐진 거다.

보라, 조상대대로 이 땅을 지켜온 거제의 후손들이여! 조국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내 땅, 내 거제는 희생했다. 당당하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상납했다. 그러나 그들도 그렇게 보아 주던가. 아가페적 사랑으로 조건 없이 한껏 준 것 아쉬워 말자.

지금도 필자는 내 땅 거제를 짬만 나면 두루 살핀다. 직장 물러나고 남들은 시간이 많다 하겠지만 얼마나 바쁜지 수면시간 하루 총량이 네다섯 시간 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수입이 있는 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겨우 한참의 소일거리인 농사일이 고작이고, 인정도 인사도 없는 거제 사랑을 짝사랑으로 일관되게 밀어 붙이는 격이다.

문화도 사회도, 자연까지도 병든 모습들에서 스스로 무능함에 자책하면서 세월에 낚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낚고 싶은 충동을 불끈 뭉켜지고 선혈이 짙붉은 울화 고를 토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이 보기엔 한참 쓸 데 없는 짓거리를 하는 덕에 갱년기의 어지럼증 한번 없이 지내 왔고 중추의 단풍과 쌀쌀한 새벽바람 그리고 여명 끝에 피어나는 햇살을 수없이 맞으면서도 고독할 시간이 없어 깊은 상념에 빠져보지 못한 분위기 없는 사람이 어찌어찌하여 금년 거제 가을꽃 축제 마당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원래 짬나면 돌아다니는 역마살 낀 사람임은 앞에서 언급 됐고, 이윤즉 거제축제 열흘 쯤 전에 인근시의 국화축제지인 돗섬에 여럿이 동행 기회가 있었다.

생전 초행길인데 오백 명이 한 번에 승선하는 대형 여객선이 평일인 그날도 쉼 없이 왕복하여 작은 섬에는 온통 사람 밭이라 첫인상부터 흐리더니 전시된 국화가 순 과시용 대형 다륜국 열 몇 작이 고작이니 짜증스러웠다. 거기다 발길마다 노점상이 즐비하니 빠져나오는데 집중해야 했었다.

오는 길에 거제축제는 언제부터인데 1회 부터 들렸으니까 금년 3회째도 가봐야 했는데 개관하고 한참 후인 7일에 첫 걸음을 했다.

흐린 날씨 간간이 가랑비 내려 분위기 또한 괜찮다. 평일 오전이라 많지는 않지만 관람객의 발길사이가 몇 걸음 정도다.

1-2회에 비하면 규모부터 대단했다. 9만여㎡(약 3만여평)의 농촌지도소 구획 전역을 수천 개의 국화분과 땅에 심은 재배국으로 엄청난 국화꽃 단지를 펼쳐놓았다. 어쩌다 한두 해에 한 번씩 거제 밖으로 국화를 비롯한 꽃 전시회를 관람한적 있지만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거기에다 각종 시범포와 전시포장을 활용해 놓아 감상하고, 즐기고, 배우기까지 하니 일석삼조다. 또 11동의 유리온실(연면적 약 1만7,000㎡=3,500여평)에 각종 식물류와 찬조 출품한 야생화(400여점)와 임시 하우스에 진열된 한국화와 사진동우회 회원작품 200여점. 간혹은 아는 이의 작품이 있어 더욱 다정스럽다.

그 뿐만 아니다. 국화분재 회원 작 350여점과 전통규방, 염색, 수공예 동아리 등에서 선보인 각각 400여점이 넘는 예술품(필자의 눈)이 공간 활용까지 감안한 듯 한 진열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또 있다. 신현과 장승포 농협 주부대학에서 나온 봉사요원님들 그리고 거제대학 학생들과 거제면 의용소방대 대원들이 도로변 입구에서부터 임시주차장 등 곳곳에서 안내와 안전예방에 수고들 하신다.

동행한 큰 딸이 자꾸 사진을 찍잔다. 원래는 아버지가 카메라 후래쉬를 싫어하는 줄 알면서 졸라, 아내와 찍었다. 내 허상은 정상적인 인간이지만 내면의 실상은 잘 익은 나락 논에 새 쫓는 허수아비와 닮아 요청해서 또 찍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