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불편하고 물건을 납품 할 수 없는 것 보다 사람들의 선입견이 더 힘들었습니다.”
지난 1995년 대경물산을 만든 양대생 대표(41). 넉넉한 자금도 건강한 몸도 그에게 없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양 대표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부터 불편한 몸을 이끌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불편한 몸은 단지 넘어야 할 대상이었을 뿐 실질적인 장애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신체적 장애보다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이라는 장애가 더 견디기 힘든 장벽이었다고 토로한다.
양 대표가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지만 그가 걸어 온 과정은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삶의 지침서가 된다.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자개단추공장은 근로할 수 있는 장애인에게 근로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부푼 꿈도 잠시. 문을 연지 6개월 만에 IMF를 만나면서 문을 닫게 된다. 공장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에게 큰 아픔이었지만 함께 했던 직원들의 생계가 더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1억2,000만원의 빚을 내고 가죽제품공장을 설립한다. 처음 공장을 설립하고 제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만 회사가 성공하면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품을 만들었다.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제품이 완성됐지만 문제는 판로였다. 그가 생산한 제품은 조선소나 공사현장에 쓸 피혁제품으로 거제지역에서 많은 양이 소비되고 있었지만 기존의 거래처를 제치고 물건을 납품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품을 소개할 목적으로 여러 회사를 찾았지만 회사 관계자들의 시선은 제품이 아니라 제품을 만든 사람과 제품을 납품하러 온 사람의 불편한 몸에 집중됐다.

그는 “처음 제품을 납품 할 때 선입견 등으로 제품을 쳐다보지도 않아 몰래 제품을 두고 오는 일도 많았다”고 당시 어려움을 설명한다.
그는 제품을 거부하는데도 거제지역의 기업에 문을 두드리기를 계속하는 한편, 거제뿐만 아닌 전국의 수많은 문을 두드렸다. 결국 진정한 노력은 양 대표를 배반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지금은 거제뿐만 아니라 전국에 거래처를 두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거제공구대리점 피혁제품의 경우 시장 점유율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 공장운영이 원활하게 돌아가면서 직원 수도 크게 늘어났다. 처음 5명으로 시작했던 조그마한 공장이 이제는 30명이 일하는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더구나 2005년 경상남도로부터 여성장애인 전용 작업장으로 선정되면서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특히 성(性)과 장애라는 이중고로 취업이 더욱 열악한 여성 장애인들에게 고용창출의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하지만 아직도 거제지역의 기업에 납품은 저조하다. 삼성조선에 매달 납품되는 용접장갑 1,500켤레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데다 아직도 그가 만든 제품을 꺼려하는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거제시나 사회적 관심도 문제다.
선거철이나 연말에는 언론 보도를 위해 관심을 보이는 척 하다가 그 기간만 끝나면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대경물산 직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인정받는 것만이 자신들이 인정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제품을 개발하고 양질의 제품을 만드는 일에 전념한다.
거제시는 그동안 중공업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고용창출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들에게 거제시와 조선산업이 준 혜택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 대표는 “항상 더 낳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에게 넉넉한 월급을 주지 못해 미안했다”며 “앞으로 이 사회가 일할 수 있는 장애인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선진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