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적 꿈은
내 어릴적 꿈은
  • 거제신문
  • 승인 200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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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표 거제수필문학 회원

6·25전쟁의 포탄 소리가 멈춘 이듬해인 1954년 추석을 넘긴 청명한 가을 어느 날 오후, 이집 저집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막 피어 올라갈 때 나는 장목면 관포에서 태어나 5남매의 맏이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대개 농어촌이 그러하듯이 반농반어의 집안이었다.

그런데 내 생일이 다가오면 특별히 어머니 생각이 난다. 우리 어머니는 스물한 살에 형제가 여섯이나 되는 가난한 집 맏며느리로 시집오셨다. 갓 시집온 새댁이 만삭의 몸을 안고 추석음식 장만하랴, 가을걷이 거들랴, 몸과 마음이 참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추석 지나고 9일 만에 내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어릴 땐 나도 여느 동네 아이처럼 망나니로 자랐다. 마음 안 맞으면 친구들과 한바탕 싸우기도 하고 잘 놀고 있는 여자애들 고무줄도 끊어버렸다. 책 보따리는 독립군처럼 어깨에 메고, 학교 갔다 오면 바로 마루에 휙 던져버리고 바다로 산으로 어디든 쏘다녔다.

초등학교 때에는 옆으로 흰 줄이 난 까만 팬티바지에 흰색 러닝 차림이 우리 또래들의 여름 정장이었다. 겨울이 되면 코르덴 저고리 소매 끝에 코를 발라 빤질빤질 윤이 나는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용이 따로 없었다. 여름옷을 겨울에 입으면 겨울용이고 겨울옷을 봄에 입으면 봄옷이었다. 옷에 큰 신경 안 쓰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우리 어릴 때 관포라는 동네는 장목면 중에서도 가장 잘사는 동네였다. 겨울에 대구어장이 시작되면 한 집에 몇 동씩 대구를 잡아 올리곤 했다. 한 동은 100마리를 말하는데 대구 철이 되면 우리 동네는 경기가 참 좋았다.

메기도 한창이었는데 요사이는 오히려 메기가 더 시원한 맛을 자랑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메긴 생선 축에도 못 끼었다. 가끔 대구도 한 마리씩 말리긴 하지만 집집마다 메기를 말려 처마 밑에 쭉 걸어 놓곤 했다.

철 지나서 밖에서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대청마루 독에다 넣어놓은 바짝 마른 메기를 끄집어내 빨래판 위에다 놓고 실컷 두들겨 팬다. 야들야들해지면 찜으로 해서 먹든지 미역국에 넣어먹든지 아니면 그냥 찢어서 어른들 술안주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 메기포를 고추장에 찍어 먹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여름철에는 거의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소금에 절인 이마며 새까맣게 탄 몰골이 영락없는 아프리카의 쿤타킨테가 아닌가. 바다는 우리들에게 유일한 놀이터고 어린 시절 추억의 무대였다.

그냥 하는 수영은 시시해서 파도타기를 즐겼는데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위로 솟아오르다 타이밍이 잘 안 맞으면 물세례를 맞고 꽥꽥 거렸다. 잠복 질을 해 뽐내려고 배 뒷머리에서 앞머리로 길게 뚫었는데 고개를 쳐들다가 머리로 배 밑창을 쥐어박던 일도 있었다. 겁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즐기던 시절이 기억난다.

이때 익혔던 나의 수영실력으로 경찰간부교육을 받던 시절에 인천의 송도에서 간부들과 동기생 전원이 모인 수영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한 전력이 있고, 이로서 돌고래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어쨌거나 어릴 때 그런 몰골로 산으로 들로 소 먹이러 간다. 주로 감산골 능선으로 가는데 동네 형들과 또래들이랑 같이 간다. 산 이쪽에서 소를 놓아 저쪽에서 찾아온다. 산등성이에서 소가 안 보이면 동네 형들은 우리를 정찰대로 보냈다.

소를 풀어놓고 밀이나 보리를 꺾어 와서 ‘밀 모태, 보리 모태’를 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지펴 보리나 밀을 그을려 손에 비벼서 후후 불어 한입에 털어 넣고 씹으면 정말 맛있다. 손이나 얼굴에 검정이 묻어 시커멓게 된다. 모두들 서로를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는다. 서로 자기 얼굴은 못 보고 남의 얼굴만을 쳐다보고는 ‘꼴이 말이 아니라’고.

가끔씩 옆집 밭에 고구마를 슬쩍 뽑아 와서 풀잎이나 잔디에 문질러 씹어 먹는다. 그때 먹던 고구마는 왜 그렇게도 맛이 있던지……, 봄에는 참꽃을 우물우물 씹어 먹던 기억, 피비가 나올 땐 피비를 한 움큼씩 까서 씹으면 단맛이 나고 상긋한 향이 입에 맴돌았다.

지금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지만 새록새록 그리운 시절이다. 바깥세상을 까맣게 모른 채 지구촌 한구석에서 거제 촌놈은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 뒤로는 푸른 송림, 앞으로는 일본 대마도가 눈앞에 보이는 푸른 바다 그 바다를 보면서 호연지기를 키워왔다. 그 속에 뛰놀던  나의 어린 시절은 지금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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