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막 칠 땅 한 평을 얻지 못하여 산에 장막을 쳤다는 것이나, 먹고 살기 위하여 농사를 지으려 해도 비가 내리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몇 번이고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은 고향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의지하고 떠난 사람에겐 감당하기 힘든 너무도 가혹한 결과였다.
또 한 사람, 욥은 동방 제일가는 부자였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겨리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거느린 대 갑부였던 그이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다 날아 가 버리므로 일시에 알거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시 의인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도 경건한 삶이 몸에 베인 철저한 기독자였으나 그에게 닥친 재난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 그 자체였다.
믿음의 사람에게 왜 이런 고난이 왔을까?
베드로서에는 세 가지 유형의 고난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가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둘째가 애매히 당하는 고난 마지막이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이 그것이라고 했는데 위의 사람들은 그 중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랄 수 있을게다.
그런데 성경에는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남북 합쳐서 40여명이나 되는 왕들 중 가장 성공한 왕이라는 찬사를 듣는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눈물 나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가장 비참한 때가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피난을 떠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구약성경 사무엘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갔다고 했다. 일국의 왕이란 사람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울면서 산비탈로 걸어서 도망갔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일어남직한 일 곧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이다. 즉, 고난은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도 인과응보이나 사필귀정이란 말들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 내지는 경제 위기에 처해있다. 위기란 말은 그리스어의 ‘Krinein’에서 유래되었는데, 본래는 회복과 죽음의 분기점이 되는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병세의 변화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사용되었다 한다. 회복과 죽음의 분기점, 사느냐! 죽느냐!의 생사의 갈림길이 위기란 말이다.
그러니 위기의 다음 단계는 죽음이라 하니 현실적인 다른 말로 한다면 파국 또는 성경에서 보았듯이 고난의 시기가 온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원인 없는 고난은 없다. 그 원인은 애매히 당하는 것이냐 아니면 죄 때문이냐 아니면 선을 행함으로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원인은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금융 또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살펴 보건데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위기는 아닐 것이고 애매한 고난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죄 때문에 즉 뭔가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결과물이라 하는 것이 옳으리라 여겨진다.
과거 우리는 IMF라는 혹독한 고난의 시기를 경험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각자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 흥청만청이었고 해외로 빠져 나가는 여행객이 줄을 이었지 않았던가! 우리 국민 모두의 책임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국회도 장관의 말꼬리 잡고 싸운 지가 벌써 몇 달인가! 시급한 민생법안은 그들에겐 강 건너 불이다.
여론의 주도층 되는 네테즌들은 또 어떤가? 하루에도 수십건씩 댓글이나 달고 앉아있는 자가 무슨 국민의 여론을 대변하는 자란 말인가! 노조도 국익과 공익보단 너무도 사익을 챙기는 사단(私團)으로 전락한지 오래지 않은가!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가자!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사필귀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