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진달래꽃
  • 거제신문
  • 승인 200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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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딸아이의 결혼식장에서 동창생들을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코흘리개 개구쟁이였던 녀석들이 모두 중후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업에 성공한 친구도 있었고 직장에서 간부가 된 사람도 있었다. 새침데기 여자애들 역시 온화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주위를 연신 살폈다.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치게 했던 친구 ‘옥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기에 틀림없이 오리라 생각을 하고 갔기 때문에….

혼례식이 끝나고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차례 술잔이 오고 가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우리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있었다. 공부는 누가 잘했고 글짓기와 운동은 누가 잘했다는 등 온갖 추억담으로 떠들썩했다.

한 친구가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옥이가? 고향에서 평원이가 올라왔는데, 잠깐 왔다 가면 안 되겠나?”

친구들이 권한 술 때문이었을까. 내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옥이는 사정이 있어 못 오니 대신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당부했다 한다. 그녀의 남편도 한 동네에 살았던 터라 우리 모두 몰려갔다.

옥이는 초등학교 때 내 짝궁이었다. 얼굴이 예쁘고 공부도 잘하였으며 학예발표회 때는 독창이나 연극에도 중요 배역을 맡곤 했다.

우리 마을 뒤쪽에 ‘우두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곤 했다. 옥이와 나는 산나물도 캐고 땔나무도 하러 곧잘 산으로 가곤 했었다. 진달래 꽃잎을 따서 먹거나 꽃잎 속의 암술을 뽑아 서로 당기는 놀이도 하였다. 서로 이기려고 조심스럽게 당기다보면 손이 맞닿았다. 그럴 적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은근히 또 닿고 싶었다. 그녀도 배시시 웃었다.

어느 해 여름에 옥이는 홍역으로 열흘이 넘게 결석을 하였다. 하루에 몇 번씩 보아도 또 보고 싶던 옥이를 만나지 못하니 병이 날 것만 같았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으로 갔다.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진달래꽃』 시집만 손에 쥐어주고 돌아왔다.

비상금을 털어 시집 두 권을 샀던 나는, 한 권은 옥이에게 주고 한 권은 지금껏 내가 보관하고 있다. 가끔 그 시집을 펼치면 우두봉 분지에 붉게 핀 진달래와 그 덤불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옥이의 영상이 그려지곤 한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는 시구는 옥이와 나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었다. 옥이 앞에만 서면 콩닥거리던 심장의 박동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 그녀를 지켜 주리란 다짐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나는 집안 사정으로 서둘러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도 몇년 뒤 결혼을 해 고향을 떠났다. 이후로 우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날, 몇십 년만에 옥이를 만난 것이다. 눈가와 이마엔 주름이 패고 흰 머리칼이 보이지만 미소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느새 할머니가 다됐다고 쑥스러워하며, 고향에는 친척집 대소사에 가끔 들르곤 했다며 나의 근황을 모조리 꿰고 있는 게 아닌가.

오랜만의 만남이었건만 조금도 서먹하지가 않았다. 소꿉놀이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달콤한 생각은 잠시뿐, 현실로 돌아왔다. 옥이의 남편이 산재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가 얼마 전부터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어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데다 수족마저 불편하여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녀 또한 간경화 초기라 했다. 그래서 간에 좋다는 토마토 주스를 매일 마신다며 우리들에게도 토마토 주스 한 잔씩을 권했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와, 이곳까지 왔다가 그냥 내려갔으면 원망했을 것이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정작 하지 못하고, 종종 소식 전하며 살자는 말만 남기고 돌아왔다.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침에 아내가 토마토를 갈아서 잔 가득 따라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토마토 주스 속에 옥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홍역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마터면 ‘옥아’ 하고 부를 뻔했다.

오늘은 이제껏 미루고 있던 편지를 써야겠다. 옥이는 남편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고 허전할까. 고향의 토마토를 사서 편지와 함께 보내주어야지, 지금 우두봉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었으니 한번 다녀가면 좋겠다는 내 마음까지 담아서….

아니다. 아무리 그리운 마음이 솟구쳐도 그리운 마음에 편지를 쓰는 것만은 참아야겠다. 어릴 적 순진했던 그 순정이 무너지지 않은 채, 가슴속에 오래 오래 묻어두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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