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부면의 지명은 세종 14년(1432) 거제현아를 사등에서 고현으로 옮기고 관하에 7개 면을 두었는데 이때 동부면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거제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까닭으로 서부면과 상대해 동부면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동부면은 신라 경덕왕 16년 주군현 개편으로 거제지역이 거제군으로 칭하자 아주, 명진, 송변으로 세개의 현을 두었는데 명진현은 치소가 명진이고 송변현은 율포가 치소였다.
고려 고종 23년(1236) 합천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 81,258枚의 원본이 모두 거제목으로 노자산 일대에서 자생한 후박나무임을 기술하고 있다.
세조 11년(1465)에는 수군절도사에서 11수영을 두었는데 경상우수영을 오아포인 가배량에 설치했고, 성종원년(1470에) 거제칠진의 하나인 가배량진을 두고 국방의 요충을 담당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장군이 맨 처음 통제영을 가배량성에 만들었다가 다음해 한산도, 고하도(목표), 고금도(완도), 춘원포(통영) 등으로 이동했으며 1597년 3月 통제사 원균장군이 다시 가배량에 통제영을 뒀는데 7月 16日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8月에 통제사 재임된 이순신장군이 한산도로 이영했다.

○학동마을
거제도의 동남쪽 대한해협을 끼고 지형이 학동만의양쪽산 줄기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며 따뜻하고 소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가을철마다 학이 찾아오니 학골또는 학동이라 하였다.
○수산마을
학동)의 동쪽 바닷가에 위치하여 본래 고동구미라 하였는데 대한해협의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수산동식물) 720여종이 서식하는 용궁같은 맑은 바다와 뒤의 논개산이 막아 피한서의 마을로 수산이라 하였다.
○율포마을
동에는 노자산 서북은 동망산 서남은 울포만이 깊숙히 들어와 항구를 이룩하여 본래 밤개라 하여 율포로 불렸으며 장목면 율천에 있던 율포보를 현종 5년(1664)에 가배량의 우수영으로 옮겼다가 숙종 14년(1688) 율포로 옮겼다가 고종 26년(1889)에 통제영과 함께 모두 없어졌다.
○오송마을
본래 오심정 또는 오송정이라 하였는데 부춘리의 서편에서 해안따라 길가에 소나무 다섯 그루의 숲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호마을
본래 오동나뭇골이 바닷가에 있어 동호라 하였으며 이는 거제면에 편입된 오수항리의 오동나무와 서로 상통하는 지명이었느나 작은 오심정 또는 중령개라 하였으므로 산달도와 마주보는 동부면의 호수같은 바다를 뜻하여 동호라 불렀다.
○영북마을
서남쪽의 가배리와 동남쪽의 율포리, 동쪽의 부춘리로 넘어가는 가파른 준령이 있고 동망산의 북쪽에 위치하여 영북이라 하였다.
○영월마을
영북의 남쪽 아랫땀넘이라 하였고 가배리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개 밑 마을이라 영월이라 불렀다.
○산양마을
산양의 동남쪽에 감로산이 높고 앞에 오망천이 흐르며 넓은 들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이라 산양이라 하였으며 신현읍, 거제면, 남부면으로 통하는 삼거리이고 면사무소가 있다.
○동산마을
산양마을에 속하는 동쪽으로 면사무소를 옮기고 초중학교와 경남학생수영장이 있다. 산양의 동쪽으로 동산이라 불렀다.
○유천마을
본래 버드나무가 냇가에 있어 버든 또는 버드내라 하였는데 벼루목으로 넘어가는 까구매재 밑에 큰절이 있어 대자대비의 교화를 하였으니 화치라 불렀다고 전하며 지금은 절이 없고 버드내마을이라는 뜻의 유천으로 남아있다.
○부춘마을
본래 불개미와 송치골의 두촌락이었는데 불개미를 부춘으로 고쳤음은 노자산 밑이라 거제봉산의 수림이 울창하여 수원이 풍부함으로 가뭄없이 부촌이라는 뜻으로 부춘이라 하였다.
○구천마을
신현읍 문동고개와 반송재 그리고 일운면의 망치고개, 동부면 구천동 골짜기 절골에서 아홉개의 냇믈이 합치는 곳 마을이라 구천동이라 불렀고 길이 13.7k㎡의 오망천은 거제도 제일의 하천으로 1987년 구천댐을 건설하면서 970만M/T의 저수량에 1일 공급 2만 M/T 을 공급하게 됐다.
○연담마을
구천이 모여 연못이 생겼으니 벼루목이라 하였는데 1957年 동부저수지를 건설해 거제평야 248Ha의 논에 물을 공급하고 있어 구룡호라 하였고 벼루목을 연담마을이라 불렀다.
○평지마을
본래 구천동의 남쪽 학동고개 밑의 좁은 골짜기인데 평지라 하였음은 거제평야애 접하는 평지를 산촌리라 부르고 이곳과 바꾸어졌다는 구전이 있어 산골에도 논이 있으니 평지라 고쳤다고 전해진다.
○가배마을
임진왜란때 오아포라 불려졌으나 그 뒤에 가부랑 또는 가배라 불렀는데 노자산이 뒤를 막아주고 가배만의 양쪽 북의 함박금과 남의 대홀개의 땅끝이 길게 뻗어 까마귀가 날아 가는 형상으로 오아포라 하였고 뒤의 동망산이 등 뒤를 감싸주는 형상이라 해서 가배라 불렀다고 한다.
○함박금
가배의 서쪽 함미기에서 쪽박금, 함박금에 이르는 길다란 땅끝의 안개가 함지박의 형상이라 함박금마을이라 하였다.
○가부랑개
뒷산 동망산이 높고 가배만의 물결이 잔잔하여 부자마을이라해서 가부랑개라 불렀다고 한다.다.
○가배량성
세종) 2년(1420) 경상좌도 안무사가 오아포에 처음으로 만호진을 두었고 세조) 11년(1465) 경상우수영을 두고 축성했다. 둘레 1,487㎡(2,620尺) 높이 7.4㎡(13尺)이고 성안 43,373㎡의 석성으로 1991년 12월 18일 지방기념물 제110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가배만
본래 가부랑개라 하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통제영을 가배지역에 두었는데 해전의 유동으로 한산도, 고하도(목포), 고금도(완도), 춘원포(통영))등으로 옮겼다
○가배량진
세조 11년(1465) 경상우수영을 두었고 성종원년(1470) 거제칠진 중에 하나로 무종사품의 만호진에 전선, 병선, 사후선 2척과 요망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