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집을 간혹 찾는 것도 아이들과 함께 자연의 향취에 묻혀보고 싶은데서 비롯된다.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든, 아님 가까이 있든 시골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더러 친부모님이 아니 계셔도 고향에 가면 구수한 숭늉을 이웃들이 넘겨준다.
시골집의 풍경은 동물농장을 연상케 한다. 닭 개 염소 돼지 없는 것이 없다. 그 짐승들에게 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료를 먹이지 않고, 자연 속에서 구한 먹이를 주는 것은 자식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고생하시어 움직이는 데에 힘이 부침에도 매일 잔밥을 가지러 시내 식당엘 다니신다. 어쩌다 시장에서 무청이라도 얻어 오는 날이면 횡재한 마음으로 고루 나누어 먹이신다.
가축들의 눈에 총기가 돌고 몸의 윤기가 남다르다. 성장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다. 야채가 흔해지는 계절이 되면 어머니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진다. 시장을 돌며 다음 날엔 팔 수 없는 시든 야채들을 얻어 집으로 나르신다.
어쩌다 꿈을 잘 꾸었는지 야채 도매상 아주머니가 한 무더기의 싱싱한 배추를 가져가라고 하자 어머니는 신이 나신다. 서너 번 옮기면서 힘에 부쳐도 아랑곳없다. 자식 같은 염소나 닭에게 먹일 거라 생각하며 마냥 행복해 하신다. 저녁나절엔 배추를 다듬어 잘 자라고 있는 닭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준다. 싱싱하게 물기 배인 배추를 어찌나 잘 쪼아먹는지 대견스럽기만 하다.
오늘따라 괘종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새벽을 알리는 ‘꼬끼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합창이나 하듯 잘도 울어댔는데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덜컥 겁이 났다.
밤새 뒷산에서 내려온 멧돼지라도 들이닥쳐 일이 생긴 것일까. 부랴부랴 닭장에 갔다.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있다. 집단 죽음이었다. 한 마리도 살아 있지 않고 몽땅 다 죽은 것이다. 바람에 떨어져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 빠진 빨래처럼 나뒹굴고 있다.
거품을 쏟아놓고, 설사 똥을 싸고, 밤새 괴로워하다가 죽어간 흔적이 역력하다. 현상을 보아 약물 중독이 뻔하다. 왜 주인님은 우리에게 죽음의 식품을 먹였을까. 원망이라도 하며 죽어간 모습이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정성을 들여 그동안 한 마리도 병들지 않고 튼튼하게 키워 왔다. 건강하라고 엊저녁에 사람들이 즐겨먹는 배추를 먹인 게 탈이 난 것이었다. 사람이 먹는 배추가 독약이 되었다니. 더럭 겁이 났다. 밤새워 절인 배추를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소름이 끼쳤다.
배추에 얼마나 많은 농약을 쏟아부었으면 닭들이 집단으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독약에 절인 배추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을까. 원인도 알 수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겠지. 상품으로 만들어 돈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 현실이 무섭다. 농약으로 야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보도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듭된 일들에 지쳐 둔감한 다수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먹거리 보도에 더러 충격적인 일들도 많았지만, 쉽게 잊혀져 갔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때가 있다. 망각이 없었다면 이 세상을 신뢰할 수 없는 갖가지 사건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불신만 커져 갔겠지. 그리고 나 또한 둔감해져 독약을 마시고 시름시름 또 그렇게 죽어가겠지.
자연속의 동물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유독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만이 영악스럽게 짐승을 해하고, 이웃을 해한다. 그 좋은 지혜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이웃을 죽음의 구렁텅에 밀어넣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인간의 그 이기가 이 아침에 내 머리를 때린다.
‘유기농법’, ‘자가재배’하며 떠들고 있다. 그렇지만, 바쁜 현대인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고르고 확인하며 사먹을 수 있는 여유가 얼마나 될까.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의 뇌를 마비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런 행동은 우리의 명을 재촉하는 행위일 것이다.
어른들이야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종내는 무덤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막 태어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현실이 무서울 따름이다.
떼죽음을 당한 닭장 안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물이 안쓰럽다. 허무를 넘어 절망에 주저앉은 어머니의 꿈이 이 아침에 너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