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운면 마을지명 알기
일운면 마을지명 알기
  • 최대윤 기자
  • 승인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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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마을

일운면(一運面)은 거제도(巨濟島)를 동북과 서남으로 양분(兩分)하는 중앙지역(中央地域)이며 와치(臥峙)에서 와현(臥峴)으로 길게 뻗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해 일운면(一運面)이라 했다.

지세포리
○ 지세포
영조 45年 방리개편으로 지세포방이라 했는데 고종 26年 대동, 회진, 교항, 선창리의 4리로 분리됐다가 1915年 지세포리로 법정통합 됐으며 1942年 부락구제로 선창, 교항, 회진, 대신, 대동, 공령의 6구가 됐고 1961年  거제군 조례에 의해 행정리가 됐다.

○ 선창마을
지세포만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성종 원년(1470) 지세포진을 두고 성을 쌓았으며 군선이 정박했고 진공및 세곡의 하물선이 접하는 선창으로 거제읍지에 의하면 고종 26年 왜공의   미창이 있어 선창리로 불렀다.

○ 교항마을
옛부터 마을 어귀에 다리를 놓아 다리목이라 했으며 1930년 지방도 개설때 교량을 새로 놓았다.

○ 회진마을
본래 바닷가 모래밭이라 사름, 새롬이 또는 사림이라 했는데 구슬 같은 모래가 파도에 모여서 백사장을 형성했고 방풍림으로 심은 소나무는 모래밭을 시원하게 했으니 회진이라 했다.

○ 대신마을
고종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민이 입주해 1918년 현재 지세포리에 69호(戶) 544명(名)이나 되어 어업의 전진기지가 됐으나 1928年 일운면사무소를 고현에서 옮겨와 마을이 번창해 대신마을이 생겼다.

공곶이
○ 부상해산회사 터
고종 26年(1889)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민이 입주해 대신마을의 모래사장에 큰 뱃집으로 기와집을 지어 고래잡이 회사를 설립해 작은 고래고기는 간질해 일본으로 모두 실어갔으며 뒤에 이 회사는 울산의 장생포항으로 옮겨갔다.

○ 미조라(彌助羅)마을
지세포리 동남쪽 2㎞지점에 지심도(只心島)를 바라보는 갯가에 20여호의 어촌이 있었는데 1981년 한국석유개발공사 제5비축기지 조성으로 모두 이주했다.

○ 지세포진
성종 원년(1470) 거제칠진의 하나로 진을 두고 만호가 집정했는데 임진왜란때 해전의 유동으로 만호 한백록이 옥포진에 합동했다가 효종 2年(1651) 다시 복구됐다.

○ 지세포성
지세포만의 남쪽 산위에 지세포진성(知世浦鎭城)으로 쌓았으며 둘레 1,096m 높이 3m의 산성이다.

와현해수욕장
○ 와현마을
본래 누우래, 누우뢰, 눌일, 눌일티 또는 와현이라 했는데 이는 지세포 고개가 낮아 올라서 보니 남에는 구조라만이고 북에는 지세포만에서 드나드는 고깃배를 누어서 보다가 잠이 들었으니 누우래라 하고 와현리로 했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일운면은 남북으로 거제도를 동삼면, 서사면으로 갈랐고 동남끝의 와현과 북서끝의 와치로 양쪽이 누웠으니 1914年  우리나라 두 번째의 큰섬 거제는 통영에 통합되어 39년간 군(郡)없이 살아왔다는 구전이 있다.

○ 예구마을
본래 왜구미방으로 왜구, 왜구미, 외기미라 했는데 이는 왜나라의 어선이나 왜구들이 침범해 왜구미라 했으며 고종 26年(1889)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선 예인망이 들어와 예구라 했다.

○ 망산(望山)
예구 동쪽에 있는 높은 산으로 임진왜란때 망을 보았다.

외도
○ 외도(外島)
본래 밭이 많아 밭섬이라 했는데 안섬에서 남으로 떨어져있어 밖에 있는 밖섬 또는 외도(外島)라 했으며 면적 150,932㎡의 큰섬에 동도(東島)가 붙어 있고 10년전 서울 사람이 매수하고 열대식물 농원을 조성해 자생식물 620여종에 열대식물을 재배해 700여종으로 늘어나 남국을 방불케해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있는 거제의 제일 관광지이다. 특히 동백과 팔손이 나무가 울창하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의 원목(原木)인 거제후박(巨濟厚朴)나무 수령 200년생 다섯 그루가 선창위 약수터에 있다.

○ 동도(東島)
외도(外島)에 붙어 있는 동쪽섬으로 면적 22,017㎡이다.

서이말등대
○ 서이말등대
누우래재에서 동남으로 2㎞ 반도의 땅끝이 쥐의 주둥이 형국으로 쥐부리끝 또는 서이말(鼠이末)이라 하며 1944年 1月에 등대를 설치했는데 20초(秒)섬광으로 500왓드 45,000촉광이므로 20마일(33㎞)을 밝히며 안개가 짙은 날은 음파(音波) 10마일을 발성해 대한해협의 항로를 알려주는 남동해의 최대 등대이다.

⊙ 옥림리(玉林里)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주림포방이라 했는데 이는 배숲개라는 뜻이고 고종 26年(1889) 주림리라 했으나 1895 옥림리라 개칭 했다. 이는 옥녀봉 밑 송림이 울창하다는 뜻이며 1915年 법정리가 됐으며 1942年 부락구제로 상촌과 하촌의 2구를 두어 1961年 행정리로 지정됐다.

지심도
○ 지심도 (동백섬)
지세포 앞 큰 바다에 있는 면적 354,720㎡의 지심도(只心島) 동백섬이라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동백아가씨] [섬마을선생] 노래의 원섬이다.

⊙ 소동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 때에는 지세포방에 속했는데 고종 26年(1889) 소동리로 분리됐고 1915年 법정리)가 됐으며 1942年 부락구제였다가 1961年 소동과 신촌의 행정리가 됐다.

 ⊙ 망치리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때 망치방과 양화정방의 2방이었는데 고종 26年(1889) 망치와 양화리로 했으며 1915年 6月 1日 법정 망치리로 통합되어 1942年  부락구제로 다시 2구를 두었는데 1961年 행정리가 됐고 1982년 망양마을이 분리되어 3개 행정리가 됐다.

○ 대덕사(大德祠)
숙종 14年(1688) 거제현령 김대기(金大器)가 계룡산 중허리에 김현령재(金縣令峙)의 큰 길을 내다가 안렴사(按廉使)에 의해 과도역사를 시켰다는 이유로 파직당해 망치마을에 살았으며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입거제 선조를 모시는 사당으로 양지마을에 창건했다.

○ 망치(望峙)재
망치 서북쪽에서 동부면 구천리로 넘어가는 높고 가파른 고개에 임진왜란때 망을 보던 곳이고 숙종 14년(1688) 김현령재(金縣令峙)에 새길을 내다가 파직된 현령 김대기(金大器)가 이 재에 올라 큰 바다를 바라보던 고개라 전한다.

내도
○ 윤돌도(尹乭島)
망치 동남쪽 육지와 300m 거리에 있는 섬으로 면적 11,027㎡이며 옛날 윤(尹)도령이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썰물때 어머니가 달밤에 거제도로 걸어나가 호부(呼父)아비와 만나 놀다가 새벽에 돌아 오는데 민물때에는 섬의 목이 깊어서 물에 빠지고 고생이 많은 것을 알고서 보다 못한 효심(孝心)으로 돌다리를 놓아 주었다해 윤(尹)도령섬 또는 효자섬이라 한다.

⊙ 구조라리(舊助羅里)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항리방이었는데 고종 26年(1889) 조라도리)와 항도리로 분할 개칭 했다가 1895년 조라리라 개칭 통합되어 1915年  구조라리라 개칭해 법정리가 됐으며 1942年 부락구제였다가 1961年 거제군 조례 제4호로로 행정리제로 됐는데 1975년 삼정과 수정마을로 분할했다.
본래 자라의 목처럼 생겼다 해 조라목, 조랏개, 조라포, 목섬, 목리 또는 항리라 했으며 성종 원년(1470) 거제칠진의 조라진을 두어 만호병정을 했는데 임진왜란후 선조 37年(1604) 옥포진 옆 조라에 옮겼다가 효종 2年(1651) 다시 돌아왔으니 구조라진이라 한 것이다.

○ 구조라 해수욕장
삼정 서쪽에 길이 1,000m의 넓고 얕은 백사장 해수욕장으로 난류해역이라 수온이 따뜻해 6.25동란때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주둔한 미군이 개발했으며 해금강을 바라보는 거제도의 제일 큰 모래 해수욕장이다.

○ 조라포진
성종 원년(1470) 거제칠진의 하나로 조라포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를 두었다가 임란후 선조 37年(1604) 옥포진 옆 조라로 옮겼는데 효종 2年(1651) 다시 돌아와 구조라진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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