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경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작고 공부도 청소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매일 선생님의 책상 위에 요구르트 한 병을 올려놓고는 목이 마를 때 마시라고 하던 착한 아이였다.
어느 날 가정 방문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조선소에 다니고 엄마는 우유 대리점을 하면서 언니, 동생과 함께 조그만 슬레이트 집에서 생활하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이었다. 그해 가을 마산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편지를 보내왔다. 나도 답장을 빠트리지 않고 보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대학교 특수학과를 졸업한 후 병원에 근무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에서 특수 교사로 근무한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항상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마음가짐으로 가르쳐 왔다고 생각하는데, 민경이가 어릴 때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에 무척 반가웠다.
서울에 교육받으러 갈 때 선생님을 한번 만나 뵙겠다고 약속을 한다. 교육을 마치는 날 아들집 근방으로 찾아왔다. 10년이 지난 만남이라 너무 반가워 맛있는 점심을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대접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아차산 공원 숲길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동안 사귀면서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는데, 어머니가 반대하고 있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의사나 공무원을 택하여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간섭을 피하고 싶어 멀리 강원도로 지원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너의 장래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결혼은 당사자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계속 설득하면 허락하게 될 것이라며 경험담을 일러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청첩장이 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결혼식장에 일찍 도착했다. 신부대기실에서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고 ‘선생님’ 하면서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화장이 지워질까봐 손수건을 주면서 울지 말라고 달랬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신랑 인물이 참 좋았다. 직업도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일생을 행복하게 잘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모님 마음에 꼭 드는 자식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민경이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좋은 신랑을 맞아 딸을 결혼시켜 보내는 서운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식순에 따라 사회자가 ‘오늘 예식의 주인공인 신부 민경 양의 초등학교 은사 선생님께서 축시 낭송이 있겠습니다’라고 소개를 한다. 나는 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시를 낭송했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집에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 가실 때에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한다.
“돈은 노력하여 벌면 되지만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하늘의 선물이니 소중하게 잘 가꾸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고, 신혼여행에 좋은 꿈 많이 꾸어라.”고 했다.
집에 도착하여 지난날 나의 결혼을 생각해 보았다. 초등학교 첫 발령을 일운국민학교에 받았다. 그때 남편은 같은 면 지서에서 근무를 하였다. 남편은 나를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녔다.
어느 날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총각의 인물보다 경찰 공무원을 싫어했다. 봉급이 작다는 이유였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공부시켜 교사생활을 하게 하였으니 좋은 사위를 맞아야겠다는 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그 남자하고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완강하게 떼를 쓰며 며칠 동안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겨우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때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 대한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살아보니 인물 좋고 술 좋아하는 호탕한 성품으로 좋은 점이 더 많다.
아버지 마음 한구석에는 경찰의 작은 봉급에도 술을 좋아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딸이 항상 안쓰러웠을 것이다. 이웃에서 그런 모습을 보시며 살던 부모님의 마음을 지금 헤아려본다.
민경이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했던 마음이나 우리 아버지가 결혼을 승낙하기까지 금식을 하시면서 만류하시던 마음은 똑같이 딸의 행복을 위해서일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행복의 여신은 늘 나를 지켜주셨다.
세 자녀가 결혼하여 잘 살고 남편도 나랑 같이 명예 퇴직하여 젊어서 못했던 사랑을 속죄하듯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우리 가정을 하늘나라에서 지켜보시는 아버지에게 ‘윤 서방하고 결혼 잘해서 지금 우리 잘 살고 있으니 만족해주십시오’라고 마음속으로 말해본다.
*아차산 : 서울 광진구에 있는 고구려 유물이 많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