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를 사랑했는가
오늘도 나를 사랑했는가
  • 거제신문
  • 승인 200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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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형구 거제수필회원

3월22일.

광안리 분도 수녀원으로 부활 자정미사를 드리러 갔다. 신부님이 부활초에 불을 붙일 때까지 우린 한동안 어둠 속에서 까만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미사는 성스럽다. 왠지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평소 한 시간이면 미사는 족하지만 부활 자정미사는 제7독서까지 있어 장장 두 시간이나 걸렸다. 동행한 친구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넣었다 하며 부스럭거린다. 몸이 불편한 그녀는 계속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분심 들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무언의 제지를 하곤 했다.

미사나 충실히 드리면 되는데, 괜히 남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습관을 고치려 노력하건만 좀처럼 잘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일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ㅈ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3월23일.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밀양에 살고 있는 친구와 거제에 사는 내가 모처럼 부산에 나들이를 갔다. 친구들은 우리를 기장까지 데리고 가서 맛있는 저녁을 사줬다. 생선구이, 생선찜, 전골, 생선 종류만도 열 가지가 넘는다. 나도 바닷가에 살지만 한번에 이렇게 여러 가지 생선을 먹어보긴 처음이다.

아침에는 바람도 불고 비가 억수같이 온다. 행여 감기 걸릴까, 친구는 머플러로 목을 한 번 더 여며준다. 따뜻한 친구의 마음이 차가운 공기를 녹여준다. 친구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리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줬다. 정말 고맙다. ㄱ은 말한다. ‘부산 아­들, 진짜 좋은 친구들이제’ 맞는 말이다.

우리 둘은 기차를 타고 밀양으로 갔다. 전도연이 〈밀양〉이라는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탄 후로는 밀양이라는 단어가 예전처럼 촌스럽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 친구는 부산에서는 부산 친구들한테 대접을 잘 받았으니 밀양에서는 밀양 사람 말을 들으라고 일체 경비를 혼자서 다 쓰고 있다. 옷은 비에 젖고 마음은 친구들 사랑에 폭 젖었다.

3월 23일.

ㄹ아, 니가 보내준 메시지 읽었다. 고맙구나. 그날은 수도원에서 하루 저녁 피정을 할 예정이었다. 모처럼 집을 떠나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네 전화를 받고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나와 영세명이 같은 너에게 잠시 동안 기쁨이 되어주고 싶어서였다.

자랄 때도 고생이 많았고, 시집가서도 시집살이 하느라 힘든 너에게 한 번도 제대로 위로해 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했다. 피정을 못해서 좀 아쉽긴 했지만 또 다른 기쁨으로 네게 달려갔단다. 머무는 동안 너와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넌 계속 일에 열중하거나 TV를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이야기도 못 나누고 오니 마음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잠시 동안 네가 미웠다. 너무 똑똑해서 상대방을 앞질러 판단하는 것에도 화가 났고.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도 나는 종종 상처를 입곤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 어느 분의 말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로 작정하는 것이겠지. 이제 어두운 마음을 씻고 웃어보자.

너의 예쁜 딸 려진이 얼굴에는 늘 미소가 감돌아 만날 때마다 나를 기쁘게 해준다. 나랑 네 얼굴에도 항상 미소가 등불처럼 떠올라 온몸이 환하게 빛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3월24일.

밤 10시 버스에서 내려 차를 가지러 연안여객선 터미널을 향해 갔다.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는데 넉넉한 어머니의 품 같은 둥근 보름달이 나를 마중한다. 밤바다는 마치 월광곡에 맞춰 춤을 추는 듯 은빛 물결이 반짝인다. 오로지 바다와 나 그리고 보름달뿐인 아름다운 밤이다.

혼자서 누리는 이 고요와 아늑함. 나는 달빛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이 밤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자신을 많이 사랑하리라. 그리고 물어 보리라.

‘오늘도 나를 사랑해 주었느냐고’ 나를 정화하는 시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더 갖는 것이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내 안에 사랑이 넘칠 때 비로소 그 사랑은 이웃에게로 흘러갈 수 있으리라.

3월25일.

친구의 집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곱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 책장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찬장에 진열된 찻잔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다. 흐트러진 내 마음까지 차분히 정리가 된다. 가구며 벽지 색깔도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얼마나 정성껏 잘 키웠으면, 커다란 관음죽은 천장에 가 닿으려 한다. 초록 잎사귀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언젠가 갔던 ㅇ친구의 집안도 퍽 인상적이었다. 저 멀리 낙동강이 보이는 거실에는 고운 꽃들이 피어 있고, 통유리 저편에는 천천히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안방에는 벽 전체 크기만 한 세계지도가 걸려 있고, 친구의 발자국이 닿은 곳은 별 표시가 붙어 있다.

별이 점점 많아지면 세계 곳곳에 그녀의 발자국이 가득 찍히리라. 친구가 손수 그린 그림들은 외국에서 가져온 소품들과도 잘 어울려 집안 전체가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친구들 집이 편한 것은 비어 있는 공간 때문이다. 어느 집에 가보면 이런저런 장식품이며 가구들이 자랑이나 하는 듯 가득 놓여있었다.

내 마음 놓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답답하였다. 여행을 하다 객지에서 잠을 자면 왠지 텅 빈 여관방이 편하기도 하지만 쓸쓸해지기도 한다. 여기저기 다른데 시선을 쏟을 데가 없으니 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게 되어 그런가 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 집안을 둘러보니 너저분하고 어수선하다.

명색이 그림을 그린다면서 집안이 정돈되고 아름답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다, 며칠을 걸려서라도 깨끗하게 치우리라. 안방부터 둘러본다. 건넛방이며 거실에 어질러진 것들도 다 주워 담았다.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우기는 20평 되는 우리 집이 너무 좁은 것 같다. 아니다, 물건을 다 넣기에 좁긴 하겠지만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를 해보자. 이리저리 노력을 거듭하니 하나씩 정리가 되간다.

내 주위를 아름답게 해놓고 사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꽃들, 책, 벽, 장롱이며… 의자에게도 물어 본다. 너희들도 지금 놓여진 이 자리가 행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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