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은 한 백부장이 유대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죽어가는 자신의 하인을 살려달라고 부탁했었다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거기서라도 말씀만 하옵소서 그래도 내 하인이 나을 줄 믿습니다”라고 하던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그가 믿었던 그대로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멀리서 “나을 지어다!” 말씀만 하셨는데도 하인의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죽은 청년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메고 가는 상여를 멈추게 하시고는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는 등 기적 중에도 상상할 수 없는 기적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센세이션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퍼졌다고 했고, 심지어 옥중에 있던 세례요한에게까지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세례 요한은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시의 답답함을 토로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아니면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옳다!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 선지자가 어떻더냐? 그 선지자가 너희 보기에 시시하더냐? 너희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엇비슷하더냐?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다른 선지자와 조금 못하기라도 하더냐? 너희가 알지 않느냐, 유사 이래로 어느 선지자가 이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며 이적과 기사들을 행했으며 죽은 자를 살리더냐? 그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그러고도 또 무엇이 부족하여 오실 그 이가 당신이 맞느냐 않느냐 라고 나에게 묻느냐 말이다’라고 주님은 그 답답함을 토로하셨단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덧붙이시기를 ‘장터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보아라 한 아이가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는 춤을 추는 놀이가 있는데 어찌된 상황인지 피리 부는 아이는 피리를 부는데 춤을 추어야 할 아이가 춤을 추지 않고 있으면 그 놀이가 어찌 성사되겠느냐 지금 상황을 보아라, 내가 하는 일들이 범상한 일로만 보이느냐 죽어가던 자가 낫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도 모르겠느냐 무슨 능력을 더 보이며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앞의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말씀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날이면 날마다 따라다녔지만 그들은 떡이나 얻어먹고 기적 구경이나 하려고 했지, 진정 그 속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보지를 못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다시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보려고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갔더냐?’고 말입니다.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다니셨습니까? 떡이나 얻어먹을까 하여 다녔습니까?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구경이나 하려고 다녔습니까? 혹 교회 다니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떡 주는 곳이 아닙니다. 병 고쳐 주는 병원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곳이요, 하늘나라를 준비 시키는 곳입니다. 이것을 보아야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했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 대한 확신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 나라 준비에 바쁜 사람이 되십시오! 세례요한 같이 주님을 실망시킨 그 ‘실망시킨 주인공’이 되시지 마시고, “하늘에 대한 확신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여러분 되시며 그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