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옥포지역 지명과 역사
장승포·옥포지역 지명과 역사
  • 최대윤 기자
  • 승인 200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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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지역은 신라 문무왕 17(677) 상군에 속하는 거로현이었고, 경덕왕 16年(757) 거제군의 속현으로 아주현이라 하고 치소를 두어 아주성 쌓았다.

고려 원종 12年(1271) 왜구의 침범으로 아주현의 인물은 모두 거창현에 속하는 가조현으로 피난갔다가 조선 세종 4年(1422)에 옛터로 돌아왔다. 세종 14年(1432) 사등성이 협소해 고현에 거제읍성을 쌓고 거제현아를 옮기고 관하에 칠면을 두었는데 이때 장승포지역은 이운면이라 칭하고 권농관이 집정했다.

성종 원년(1470) 거제현에 칠진을 두었는데 옥포진을 두고 만호병정을 하였으며 성종 19년(1488)에는 진성으로 옥포성을 쌓았는데 1990年 12月 20日 지방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됐다. 선조 25年(1592)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있을때 5月 7日 왜선 26척을 격침한 옥포대첩으로 제해권과 연승의 기틀이 됐으니 승리, 은혜, 역사, 구국의 고장이 됐다.

영조 45年(1769) 면방리 개편으로 고현면 이운이라 하고 장승거리, 옥명포, 관송, 당항, 아주, 옥포, 조라포, 해명, 수월, 양정의 10방을 두었다.

고종 26年(1889) 면리제 개편으로 고현면 이운을 이운면으로 독립하고 면장이 집강하였으며 제산, 해명, 수양, 수동, 양정, 상아, 하아, 거로, 관화, 옥명, 장승, 능포, 느태, 두모, 옥포, 조라, 국산 등 17개 리가 됐다.
고종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민이 장승포 항구에 입주하기 시작해 1910年 한일합방 되던 해 일본어민이 234호 1,893명에 이르러 입좌촌이라 불렀다.

고종 32年(1895) 5月 26日 칙령 제98호 면리 개편으로 장승포, 옥명, 능포), 관송, 우산, 거로, 느태, 두모, 상아), 하아, 옥포, 조라, 국산, 제산, 양정, 해명, 수양, 수동 등 18리로 개편했다. 융희 3年(1909) 6月 25日 칙령제30호 면리 개편으로 외포면이 폐지되어, 덕상, 덕하, 덕포를 이운면에 편입하였으니 21개리가 됐다.

1913年 아양에 처음으로 이운면사무소를 두고 면장이 집무하였고, 1935年 10月 1日 부령 제197호 이운면을 장승포읍으로 승격되어 아양리에서 장승포리로 옮겼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의 전시행정을 위해 부락구제 실시에 따라 구촌, 신부동, 중앙, 장승, 마전, 능포, 옥명, 두모, 느태, 관송, 당목, 장기, 탑곡, 내곡, 용소, 옥포, 조라, 국산, 팔랑포, 상덕, 하덕, 수월, 해명, 양정, 제산 등 25개 부락이 됐었다.

6·25 사변의 두번째 서울 후퇴로  제3훈련소를 설치, 이북피난민 10만명을 구호하는 보건사회부 거제도분실과 통영군 거제도분소, CAC거제팀을 창설해 전시의 후방기지가 됐다.

1957年 6月 12日 옥포대승첩기념탑을 아주 당등산성에 건립하고 1963年 6月 27日 옥포정의 낙성과 제1회 옥포대첩기념제전을 거행했다. 1973年 10月 11日 옥포조선소를 만들면서 아주성 밑으로 옮기고 1996年 6月 22日 옥포의 승치봉에 기념탑, 참배단, 옥포루, 기념관 등 옥포대첩기념공원을 준공하고 현재 거제시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1963年 일운면 고현출장소가 신현면으로 승격됨에 따라 수월, 양정리가 편입돼 7리에 21개 행정리로 됐다. 1973年 10月 11日 옥포조선소의 기공으로 아양리의 관송, 당목, 장기가 조선소에 편입되어 이주민의 옥수 1,2동이 신설되어 7리에 20개리가 됐다.

1986年 옥포조선공단의 발전에 따른 인구증가로 장승포읍 옥포출장소를 설치해 옥포와 덕포리를 관할했고, 1987年 1일운면 옥림리 중촌 1,2동을 장승포리에 편입하고 대림1·2동이라 불렀다.

1989年 1月 1日 장승포읍을 시로 승격해 옛 거제중학교에 개청하고 관하에 장승포·마전·능포·아주·옥포1동과 옥포(玉浦 2洞) 등 6개 71통을 설치했다. 1995年 1月 1日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에 따라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해 거제시가 됐으며 장승포에 거제시 민원출장소를 두었다.

이운면 거제도를 서북 고현만의 제산에서 동남 옥포만의 능포를 길게 양분하였으니 일운면과 같이 이운이라 하였고, 본래의 장승거리였던 장승포리에 읍사무소를 이전함에 따라 장승포읍으로 개칭했다.

▲ 장승포전경

⊙ 장 승 포 동
영조45年(1769) 방리개편으로 장승거리방이라 했는데 이는 북쪽 두모고개에 장승이 있어 장승거리라 불렀다.

○ 구촌마을=장승포항의입구에 위치, 본래는 갯마을이고 제주도 해녀가 입주한 곳으로 장승포리의 1구였는데 구촌으로 부른다.

○ 신부동마을= 구촌마을 위쪽에 위치 고종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으로 일본어민이 입주하면서 입좌촌이라 하고 우편소와 시장이 형성됐고 1930年 방파제를 축조해 장승포리 2구라 불렀는데 광복후에는 신부동이라 불렀다.

○ 중앙마을=장승포리의 중앙(中央)이라는 뜻이고 초·중학교가 있으며 1953年 5月 27日 거제군청과 교육구청의 소재지로 중앙(中央)이라 불렀다.

○ 장승마을=본래 두모고개 장승거리 밑으로 장승포리라 불렀는데 이는 장승거리의 뜻으로 장승마을이라 불렀다.

○ 능포마을=본래 능개라 하였는데 이는 바닷가에 늪이 있는 마을로 그 호수의 늪에 마름이 풀이 자생하는 개라는 뜻에 능포라 불렀다.

○ 옥명마을=본래 옥명포라 불렀는데 이는 거제도의 최동단 마을로 새아침에 장닭의 울음과 몽돌이 파도에 우는 소리는 대자연을 상징하였는데 밝아오는 웃골 마을로 옥명이라 불렀다.

○ 옥수마을=옥포조선소 건설에 따라 이주단지와 시장을 건설해 옥명마을 밑으로 옥수 1동이었고, 사원아파트가 군집해 옥수2동이 됐다.

○ 능포정치망 어장=대한해협의 한난류가 교차하는 깃점으로 해류의 유동에 따라 고기잡는 정치망어장이 있었는데 내강, 외강, 와수, 동월조 등 이조왕실의 궁내조였으나 일본인 향퇴원태랑이 살면서 북해도식개량대모망을 시설하고 향퇴어장이라 하였는데 광복후 거제수산이 경영하다가 민영화된 국내 제일의 어장이다.

▲ 덕포해수욕장

⊙ 덕포동
영조 45年(1769) 방리개편때 연초면 덕포방이었으나 고종 26년(1889) 덕상과 덕하리로 분리됐다가 1895년 외포면이 설치됨에 따라 덕상, 덕하, 덕포의 3리가 편입됐는데  1909년 칙령 제30호로 외포면이 폐지되고, 장목면이 신설되자 이운면에 편입됐으며 1915年 6月 1日 법정동리령으로 덕포리에 통합됐고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상덕과 하덕의 2구의 행정동에 속하는 통이 됐으나 법정 덕포동은 그대로 있다.

○ 상덕(上德)마을=강망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웃골, 감자골, 중땀 새몰, 대밭몰 여러개의 촌락인 본래이 덕상리를 상덕마을이라 불렀다.

○ 하덕마을=본래 큰개를 덕포라 하였는데 갯마을, 아래마을로 본래이 덕하리를 하덕마을이라 했다.

○ 감자골=상덕의 웃골과 중리의 중간 양지 바른 곳에 옛날 감자밭이 있었다.

○ 개끝마을=하덕의 큰개 동쪽을 개끝 또는 해변촌이라 하고 동남편에 펼쳐진 덕포해수욕장이 있다.
 
⊙ 두모동=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때 장승거리방에 속했으나 고종 26年(1889) 두모와 느태리로 분리 됐다가 1915年 6月 1日 두모리로 법정돼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2구로 나뉘었다. 1961年 10月 1日 행정리가 됐는데 1989年 1月 1日 장승포시 설치로 두모는 장승포에 느태는 능포동의 행정동에 나뉘어 편입되고 모두 이 됐으나 법정 두모동은 그대로 있다.

○ 두모마을=옥포만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해 장승거리에서 내려가면 땅끝이 막다르므로 두무실이라 하였는데 무가 모로 바뀌어 두모개 또는 두모실, 두몰이라 불렀다.

○ 느태마을=두모실의 동북쪽 장승포의 등 넘에 있고 옥포를 바라보는 음지로 해가 늦게 뜨는 북향이라 늦태라 하였는데 발음이 느태로 변하였고 지금은 옥포조선소의 확장으로 마을이 없어졌다.

⊙ 마전동=본래 삼밭이라 하였고 장승포리 마전이라 불렀으며 옥포조선소의 배후지역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행정동의 마전동을 분리하였고 관하에 5통을 두었다.

▲ 능포 야경

⊙ 아양동
영조 45年(1769) 방리 개편으로 관송과 당항방을 두었는데 고종 26年 (1889) 거로와 관화리로 개칭했이 1895년 관송, 우산, 거로리로 개칭했다가 1915年 6月 1日 아양리로 법정됐고,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로 관송과 당목의 2구를 1961年 10月 1日 행정리가 됐는데, 1973年 10月 11日 옥포조선소 건설에 따라 편입되고 옥수동 이주단지에 모두 이주하였으나 산 밑에 몇 집만 남아 있어 1989年 1月 1日 장승포시 설치로 아주동의 행정동에 흡수됐고 법정 아양동은 그대로 있다.

○ 관송마을=옥녀봉 밑 울창한 숲과 비옥한 농토가 있어 관송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 당목마을=당등산 서남쪽 옛날 이운면사무소가 있던 마을인데 지금은 없다.

○ 옥녀봉 봉수대=신현읍, 일운면과 아양동에 걸쳐있는 높이 554.7m 봉우리에 직경 12m 높이 4m의 두단으로 석축해 둥근형의 봉수대가 있는데 남서쪽 가라산, 서쪽 계룡산, 북쪽 강망산과 연결하였고 1993年 12月 27日 지방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받아 복원 관리하고 있다.

○ 옥포정=선조 25年(1592) 5月 7日 옥포대첩을 기리 계승하기 위해 옥포만 당등산성에 1957年 6月 12日 옥포대승첩기념탑과 1963年 6月 27日 옥포정을 건립하고 기념제전을 거행하다가 옥포조선소 구내로 1973년 옮겼다.

○ 이순신장군 사당터=임진왜란 때 첫번째의 옥포대첩을 기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당목에 세우고 호장이 국명을 받아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한일합방으로 모두 없어졌다.

▲ 대우조선해양 전경

⊙ 아주동

신라 문무왕 17년(677) 거제에 처음으로 상군을 두었는데 삼속현의 거로현이라 칭하다가 경덕왕 16년(757) 거제군 아주현으로 개칭하고 성을 쌓았으며 감무가 다스렸으나 고려 원종 12년(1271) 왜구의 침범으로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으로 현민 모두 피난갔다. 조선 세종 4년(1422) 거제현의 옛터로 돌아왔으며, 1989년 1월 1일 장승포시 설치로 아주동이 됐다.

○ 장기마을=아주리의 동쪽 당등산 자락에 옛날 아주현의 장터가 있었는데 옥포조선소 구내에 편입되어 모두 옥수동으로 이주했다.

○ 탑곡마을=옥녀봉 자락에 법률사지가 있고 석씨유적고탑 높이 4.6m 일단의 폭 1.6m 연화강석으로 된 옥개, 탕수, 노반등 신라유물이 발굴되어 1935년 옮겨 세웠다가 옥포조선소 공원에 다시 옮겼으며 지방유형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받은 탑이 있어 탑곡이라 불렀다.

○ 내곡마을=국사봉 아래 골짜기 따라  배골, 안골, 성안의 촌락이 합쳐 내곡(內谷)이라 하였으니 아주현성지가 있다.

○ 용소마을=국사봉의 동남쪽 옥포만을 끼고 있어 상용소와 하용소 마을이 형성하고 있으며 옛날 웃용소의 연못에서 아래용소의 늪에 이르는 엉굴이 통해 용이 드나들다 등천하였으니 용소라 불렀다.
 
○ 반정승묘=국사봉의 중허리에 거제반씨 시조 반부의 묘소로 원종 8年(1267) 원나라의 한림학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와 1274년 다시 나오면서 제국대장 공주인 알리공주를 모셔와 충열왕비가 됐으니 문하시중 기성부원군에 문절공의 시호를 받았다.

○ 옥포정=당등산 56,000평 봉우리에 있는 산성에 1957年 6月 12日 옥포대승첩기념탑과 196年 6月 27日 옥포정을 건립하였는데 1973年 10月 11日 옥로조선소 건설에 따라 1975年 5月 7日 탑골마을 앞 조선소 구내 2,704평에 옮기고 1995년 제33회 옥포대첩기념제전을 올렸는데 1996年 6月 22日 옥포대첩기념공원이 준공됐으나, 옛탑과 정자는 보존관리하고 있다.

○ 옥포 대우조선소=1973年 10月 11日 옥포만의 육지 70만평과 바다 매립지 30만평의 100만평 옥포조선소를 기공해 1978年 9月 26日 대우조선소가 인수하고 1981年 10月 17日 준공식을 가졌으며, 연산 400만톤을 건조할수 있고 세계 최대의 1,000m도크와 900M/T의 크레인이 있으며 1995년에는 잠수함, 1996년에는 구축함을 건조했다.

▲ 옥포만 일대모습

⊙ 옥포동

○ 옥포(玉浦)마을=본래 옥개라 하였는데 성종 원년(1470) 거제칠진의 옥포진을 두고 만호병정을 하였으며 동19년(1488) 해상의 방어를 위해 옥포성을 쌓아 옥포라 했.

○ 조라마을=옥개의 동편 본래 라호라 하였는데 선조 37年(1604) 구조라진을 옮겨왔다가 효종 2年(1651) 신묘에 다시 돌아 갔는데 조라관계골이 있고 신조라 또는 조라포라 했다.

○ 국산마을=옥개의 복쪽산 밑에 옛날 개암나무가 있어 진목정이라 하였는데 고종 23年(1886) 병술에 천주학이 들어와 거제도의 본당이 됐는데 1888년 윤봉문 요셉이 순교(殉敎)되자 박해가 심해 국산으로 바꾸었다 한다.

○ 팔랑포마을=본래 파랑포라 하였는데 이는 거제면의 소랑포와 풍수설의 상대성 지명이다. 팔랑포라 부른 이유는 계절따라 풍행이 다르고 파도가 변함으로 팔랑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군 8명이 숨어 살았다고 전해져 팔랑이라는 설이 있다.

○ 옥포만호비=헌종 11년(1845)을사 6월 옥포성 앞에 옥포만호 김창의 선행비와 마지막 만호 김형구의 영세불망비를 고종 25년(1888) 무자에 세웠는데 골목길에 있어 초라해 1954년 5월 옥포경로회장 하규근이 옥포초등학교 뒷등 밭에 옮겼다. 또 임진왜란 선무3등공신 옥포만호 이운용장군의 전공비를 새로 세웠는데 구획정리로 등성이가 없어지고 학교 앞으로 옮겨 문화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 옥포대첩기념공원=선조 25년(1592) 일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로울때 5월 7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장 등당고호가 인솔하던 왜선 26척을 격파한 옥포대첩의 구국의 성지 옥포만 승치봉 33,092평에 66억원을 투자해 기념탑, 옥포루, 기념관, 참배단등 19건을 1990년에 기공해 1996년 6월 22일 준공하고 제24회 옥포대첩기년제전을 거행했다.

○ 옥포성=성종 원년(1470)거제칠진의 옥포진을 두고 동19년(1488) 진성으로 쌓았는데 둘레 1,125 m(,1980척) 높이 8.5m의 석성이고 임진왜란때 왜장 등당고호에게 점령 당해 5월 7일의 옥포대첩으로 성을 탈환하였고 1990년 12월 20일 지방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됐다.

○ 옥포장선지=옥포지의 수군함선을 자이선하기 위해 내만을 축조해 선박의 풍랑대피 또는 수리를 하였는데 지금은 매립지가 됐다.

○ 옥포진=세조 11년(1465) 경상우수영을 가배양에 처음 설치하였고 성종 원년(1470) 거제칠진의 옥포진을 두고 동19년(1488) 성을 쌓았으며 선조 25년(1592) 5월 7일 성을 점령당하였으나 옥포대첩으로 왜선 26척을 격파하였으며 당시 옥포만호 이성용은 의무 삼등공신이고 선조 38년(1605)9월 제7대 통제사로 제수 받아 충열사를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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